감옥에서 온 편지와 설교 한 묶음

기자 개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뉴스가 되나

by 강펜치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상은 대개 일기장에 기록된다. 객관성을 중시하는 보도에서 기자는 어디까지나 관찰자로 남는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전면에 내세운 기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신문에서 기자 개인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지면은 대부분 칼럼에 한정된다. 그러나 개인의 이야기가 단순한 신변잡기를 넘어 사회적 맥락과 맞닿을 때, 그것은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갖는다.


내가 몸담고 있는 뉴스룸의 한 선배 기자는 수년 전 치매에 걸린 부모님 관련 글을 쓴 적이 있다. 국가 지원이 하루 몇 시간에 그치면서, 돌봄과 비용 부담이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가됐다. 병원에서 감정 조절이 어려워진 아버지,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그리고 지쳐가는 형제들의 갈등도 드러난다.


사실 이 이야기는 기자의 가족에게만 국한된 현실이 아니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치매 환자도 증가 추세다. 과거 우리 사회가 겪어보지 못했던 시련이 기자의 개인 이야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게다가 개인의 생생한 체험이 함께 수반되면서 이 기사는 소설처럼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가장 큰 디지털 매체 <AL.COM>의 칼럼니스트 존 아치볼드도 개인의 경험과 가족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장대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의 회고록 <지옥의 문을 흔들며·Shaking the Gates of Hell>는 민권운동 시기 인종차별이 일상이었던 미국 남부를 조망한다. 아울러 당시 목사였던 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며, 가족의 기억을 통해 역사와 진실, 그리고 화해의 의미를 스토리에 녹였다.


아치볼드는 미국 앨라배마에서 35년 넘게 활동해 온 언론인으로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그는 2018년 논평 부문에서 첫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어 2023년에는 앨라배마 브룩사이드 경찰의 권력 남용을 폭로한 탐사보도로 아들 램지 아치볼드와 함께 지역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공동 수상했다. 부자가 같은 취재로 퓰리처상을 받은 이례적인 사례였다. 그의 보도는 실제 법 개정까지 이끌어냈다.


나는 2024년 3월 미국 연수 프로그램 일환으로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한 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숙소를 제공해 준 대학 교직원은 나에게 지역 언론인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인연으로 아치볼드를 소개받았다. 나는 앨라배마로 떠나기 전 그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버밍햄의 한 이탈리아 식당에서 아치볼드를 만나기 전, 나는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퓰리처상을 두 번 받은 기자라는 명성에 다소 움츠러든 것 같았다. 그는 왠지 날카롭고 엄격한 모습일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텁수룩한 수염에 안경을 쓴 그의 첫인상은 무척 수수했다. 그는 가끔 스스로를 두고 너무 늙었다며 농담처럼 말하며 나를 웃겼다.


하지만 아치볼드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50~1960년대 앨라배마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중심으로 한 흑인 민권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민권운동가들은 거리로 나와 투표권과 평등을 요구했다. 특히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이어진 행진은 이러한 불평등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아치볼드는 이러한 시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가 태어났던 1963년, 그의 아버지 교회에서 20마일 떨어진 버밍햄 감옥에는 킹 목사가 수감돼 있었다. 인종분리 정책에 항의해 비폭력 시위를 이끌다 체포된 것이다.


버밍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치볼드는 자신을 괜찮은 기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족은 기독교 신앙과 전통을 실천하는 ‘선한 이웃’이었다. 그럼에도 늘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는 게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것은 그해 4월 16일 킹 목사가 쓴 ‘버밍엄 감옥에서 온 편지(Letter from Birmingham Jail)’ 때문이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앨라배마의 성직자들이다. 킹 목사는 편지에서 백인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킹 목사는 이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도덕적 용기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교회가 불의에 맞서기보다 현실과 분리된 신앙에 머물면서 도덕적 책임을 외면한 그들의 모습에 킹 목사는 절망했다.


아치볼드는 당시 침묵을 선택한 ‘선한 백인’에 대해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로버트 아치볼드도 그랬다. 아치볼드에게 아버지는 그가 믿고 따르는 모든 것의 근원이었다. 그의 가치관을 형성해 주신 분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버지의 침묵을 간과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앨라배마의 역사와 미국 남부의 역사와 관련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 주에서 침묵의 개념, 특히 백인들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미국 남북전쟁이나 재건 시대 이후, 앨라배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죠. 그 헌법은 명백히 백인 우월주의를 법으로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어요.”


아치볼드가 말한 앨라배마 헌법은 1901년에 제정된 주 헌법을 말한다. 문해력 시험과 투표세 등을 통해 흑인의 참정권을 박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저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제 아버지 또한 목사의 아들이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저는 침묵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요. 왜 그런 침묵이 존재할까? 그래서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만약 이 선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건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라고요.”




존 아치볼드의 저서 <지옥의 문을 흔들며>.


아치볼드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쓸지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실에서 서류 보관함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설교문이 차곡차곡 보관돼 있었다. 이 설교문들은 결국 그가 책을 쓰게 만든 불씨가 되었다.


아치볼드는 그가 태어났던 해 아버지의 설교문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에서는 많은 목사들이 따르는 일정이 있었다. 그해 5월 초는 감리교회에서 ‘어린이 주일’이었다. 1963년 5월 2일, 버밍엄 16번가 침례교회에서 1000명 이상의 흑인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인종 차별 철폐를 외치며 버밍엄 시내로 행진했다. 경찰은 수백 명을 체포해 구치소로 끌고 갔다.


그해 어린이 주일에 아치볼드 아버지의 설교는 어땠을까. 그의 아버지는 어린이에 대해 설교했다. 아버지의 설교는 세계 곳곳의 문제들로 이어진다. 남미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 설교에서 언급했다. 정작 교회 문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불과 일주일 전 많은 아이들이 구금된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치볼드는 여기에서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게 너무나 큰 괴리처럼 느껴졌어요. 사람들에게 먼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이때부터 ‘침묵의 공모’라는 개념을 탐구하게 되었어요.”


왜 우리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에 대해 침묵할까요? 책의 구조가 조금 독특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저는 아버지가 어떤 말을 했는지 찾는 과정과, 침묵의 공모에 대한 내용을 번갈아가며 구성했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미 구축된 체제 속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이 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 한마디라도 ‘이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죠.”


아치볼드는 이 책을 쓰면서 한편으로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최고의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그 최고의 사람이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기에 그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저는 책을 쓰면서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아버지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닐까?’ 혹은 ‘너무 관대하게 쓰고 있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결국 저는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어요.


네, 저에게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우선, 공정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저널리스트로서 저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해야 했죠.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쓰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당시에는 그런 어려운 말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분은 다른 방식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셨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진실을 전하고 싶지만, 가족을 소외시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싶었지만, 과거를 악마화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과거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죠.”


때로는 아버지와 연계된 아치볼드의 과거 기억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쓰면서 초기에 형제자매들에게 원고를 읽어보게 했다. 가족을 통해 ‘팩트 체크’를 한 것이다. 몇 가지 기억에 대해 사실관계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점은 가족들이 그의 책 집필을 전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아치볼드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이야기가 동시에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현재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있는 이 장소의 의미도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다.


다만 현재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라고 아치볼드는 강조한다. 바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아치볼드는 그의 가족 이야기와 민권운동 시대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으면서 이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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