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은 있다

스토리텔링 주인공 찾기 '오디션'

by 강펜치


어느 화창한 가을 오후, 나는 애리조나주립대(ASU) 피닉스 캠퍼스의 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마주 앉은 사람은 지역신문 <애리조나 리퍼블릭> 기자 리처드 루엘라스였다. 애리조나의 환상적인 가을 날씨를 즐기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준비 중이던 과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과제를 준비하는 동안 여러 차례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상 나의 ‘글쓰기 코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록 학위 과정은 아니었지만, 애리조나주립대 월터 크롱카이트 저널리즘스쿨에서의 연수는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나와 같은 프로그램에 참가한 펠로우들은 매 학기 두 과목을 반드시 수강해야 했다. 단순한 청강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식 학생으로 수업에 참여해 미국 학생들과 함께 과제를 제출했고 학기 말에는 학점까지 받았다.


2023년 가을 학기, 나는 연구 주제에 맞춰 ‘내러티브 리포팅 & 라이팅’ 수업을 들었다. 강사는 지역 잡지 <애리조나 하이웨이> 소속의 현직 기자였다. 이 수업의 최종 과제는 학기 말까지 한 편의 스토리텔링 기사를 완성해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역에 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취재해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담아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루엘라스에게 내가 섭외한 인물들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 인물은 당신 조언대로 한국계 미국인 가운데서 찾았어요. 한인 교회에서 70대 장로님을 만나 이민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두 번째는 얼마 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아르헨티나 출신 남성입니다. 법원에서 열린 귀화 선서식에서 그를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루엘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없나요?”


“마지막 한 명은 저널리즘스쿨에서 만난 학생이에요. 친구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계 여학생인데,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루엘라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잠깐만요.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미국에 온 것이 아니군요. 부모의 결정에 따라 온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이 쓰려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민 1.5세대보다는 1세대 이민자가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에는 더 잘 어울립니다. 혹시 20대나 30대의 젊은 한국 이민자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그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사실 나는 이미 그 여학생과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메모장에는 그녀의 경험과 기억, 기사에 넣고 싶은 장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지도 거의 정리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인물을 포기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나는 그 사실을 리처드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캐릭터 선별이 왜 중요한지 차분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을 찾는 데 스토리텔링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감독은 각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오디션을 보지요. 스토리텔링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말은 내가 쓰려는 이야기의 주연과 조연을 정하기 전에 여러 후보를 두고 신중하게 ‘오디션’을 거치라는 조언이었다. 루엘라스는 이렇게 찾아낸 이상적인 인물을 ‘유니콘’이라고 불렀다. 스토리를 단번에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인물.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을 정말 찾을 수 있을까?


본격적인 취재에 앞서 철저한 사전 조사를 진행한다면 가능하다는 확신을 나는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으로부터 얻었다. 그녀의 책 <제인스빌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나는 골드스타인과 이 책을 통해 유니콘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발굴하는지 깨달았다. 13년간 GM 공장에서 일하다 해고된 제러드 휘태커 가족의 이야기는 공장 폐쇄가 한 가정의 삶을 어떻게 흔드는지 보여준다. 또 공장 폐쇄 뒤 400km 떨어진 다른 공장으로 이동해 ‘GM 집시’가 된 노동자 맷 워펫, 협력업체 해고 뒤 교도관으로 전직했지만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크리스티 바이어와 바브 본의 삶도 등장한다.


나는 골드스타인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는지 물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1차적으로 인물 섭외에 도움을 얻은 곳은 지역 언론이었다. 제인스빌의 사정을 보도한 지역 기자를 만나 취재할 만한 인물을 수소문한 것이다. 그 기자는 책에도 잠시 등장한다.


나 역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다른 언론사 기자에게 정보를 묻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답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기자에게서 중요한 단서를 끌어내는 골드스타인의 취재력은 인상적이었다.


골드스타인이 두 번째로 정보를 얻은 곳은 노동조합 대표와 지역 직업훈련센터 책임자였다. 한국에는 ‘경당문노’라는 말이 있다. 농사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인스빌 지역 사회에서 GM 공장이 철수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는 이들 단체만큼 잘 아는 곳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저는 책에서 실직한 노동자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 이후 지역 사회를 돕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도 포함시키고 싶었어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과거에는 어땠나요?’ ‘지금은 어떤가요?’ ‘무엇이 달라졌나요?’와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리고 항상 ‘또 누굴 만나야 할까요?’라고 물었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됐습니다.”


골드스타인 역시 <제인스빌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등장시키기 위해 일종의 오디션을 치렀다. 그 기준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던 하나의 질문이었다. 당시 경제 위기를 맞은 제인스빌 사람들에게는 명확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녀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좋은 선택지가 없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녀의 캐스팅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책에는 세 가족이 나오는데요. 첫 번째 가족은 오랫동안 노동조합에 몸담았지만 결국 GM의 부품 공급 공장에서 경영 관리직으로 전환했어요. 두 번째 가족은 남편이 인디애나주의 GM 공장까지 매주 장거리 출퇴근을 했죠. 기억나세요?


세 번째 가족, 그러니까 휘태커 가족의 경우 남편이 계속해서 형편없는 일자리만 전전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어요. 이렇게 세 가족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죠.”


골드스타인은 <제인스빌 이야기>에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실명을 사용하는 원칙을 고수했다. 사람들의 실제 이름을 밝혀야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실명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이야기를 더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실명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토리텔링 기사에서 ‘유니콘’은 등장인물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배경과 장소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골드스타인은 이 배경과 공간을 고르는 데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미국에서 중산층의 삶이 흔들린 곳은 제인스빌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제인스빌이었을까? 여기에도 그녀의 치밀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당시 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을 찾고 있었지만, 원래부터 낙후된 지역은 원하지 않았어요. 혹시 ‘러스트 벨트(Rust Belt)’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네. 오래된 산업 지역을 의미하는 표현 아닌가요?”


“맞아요. 예를 들면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나 펜실베이니아 북서부의 철강 산업 지역 같은 곳이죠. 하지만 그런 곳은 이 책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안정됐던 지역이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녀는 이어 이렇게 설명했다.


“금융위기 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가운데 남성이 여성보다 많았어요. 그리고 이런 현상은 자동차 산업에서 특히 두드러졌죠.”


제인스빌은 이 이야기의 무대가 돼야만 하는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가동되던 GM 공장이 있었다. 누구도 공장 폐쇄를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잃은 일자리들은 고등 교육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직업이었어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데 박사 학위가 필요하지 않잖아요. 대학 학위조차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많죠. 그래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제가 선택한 도시에서 사라진 일자리 유형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축소판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스토리텔링 기사는 사실을 다루지만, 이야기의 힘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기자는 취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질문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 줄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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