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을 보여줘야 이야기가 살아난다
미국에서 나의 스토리텔링 탐구 여정은 보물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와 닮아 있었다. 보물을 찾는데 나에게 주어진 지도는 이번 연구를 위해 인터뷰했던 미국의 전·현직 언론인들이었다. 나는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한 가지 부탁을 빠뜨리지 않았다. 스토리텔링에 뛰어난 언론인을 한 명 더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인 페르난다 산토스는 그 요청에 두 명의 언론인을 추천해 주었다. 오랫동안 애리조나 지역을 취재해 온 경력답게, 그녀는 이곳에서 뛰어난 이야기 실력을 가진 기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프리랜서 기자, 테리 그린 스털링이었다.
스털링을 만나기 전, 여러 언론인에게서 반복해서 들은 취재 조언이 하나 있었다. 철저한 사전 조사였다. 인터뷰는 스토리텔링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각과 경험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스털링을 만나기 전에 그녀의 책 <갈색 피부 운전자라는 이유로·Driving While Brown>를 읽어야 했다.
한국의 1월은 한겨울이지만 피닉스의 한낮 기온은 20도를 웃돌았다. 거리를 걸으면 살짝 땀이 날 정도였다. 2024년 1월, 나는 피닉스 북부의 한 카페에서 스털링을 만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그녀는 활력이 넘쳐 보였다. 손주 두 명과 증손주까지 둔 할머니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스털링은 애리조나의 한 목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가족은 애리조나와 멕시코 소노라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교적 ‘문명’과 떨어진 환경이었다고 한다. 텔레비전도 없고 전기도 제한적인 곳이었다. 어린 스털링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던 통로는 신문과 책이었다.
“제가 고립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어요. 아마 다섯 살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기자처럼 질문을 했거든요. 부모님은 제가 질문하는 걸 항상 격려해 주셨어요.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이나 백과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셨죠.”
이런 성장 배경은 스털링이 <갈색 피부 운전자라는 이유로>를 쓰게 된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검은 피부 운전자라는 이유로(Driving While Black)’라는 표현에서 파생된 말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고속도로 단속 과정에서 흑인 운전자들이 다른 인종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검문을 받았다. 이후 이 표현은 인종 프로파일링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애리조나에서는 라틴계 운전자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현실을 설명하는 표현이 바로 ‘Driving While Brown’이었다. 책은 애리조나에서 벌어진 이민 단속과 인종 프로파일링 논쟁, 그리고 이에 맞선 라틴계 공동체의 대응을 다룬 내러티브 논픽션이다. 중심에는 마리코파 카운티 보안관 조 아르파이오가 있었다.
당시 애리조나는 미국 이민 논쟁의 중심지였다. 멕시코 국경과 맞닿은 지역에서 이민자 증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커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르파이오는 교통 단속 같은 일상적인 경찰 활동을 통해 이민자를 찾아내는 강경한 단속을 추진했다.
작은 교통 위반을 이유로 차량을 세운 뒤 운전자와 탑승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라틴계 주민들이 외모 때문에 표적이 된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결국 인종 프로파일링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아르파이오는 이민세관단속국(ICE)과 협력해 단속을 확대했다. 지역 경찰이 교통 단속 과정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이민 문제가 발견되면 연방 기관과 연계해 체포하는 구조였다. 이 시기는 도널드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취임하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그리고 2026년 현재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ICE의 강경한 단속이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스털링은 아르파이오를 포함한 수십 명의 핵심 인물과 수백 명의 관련 인물을 인터뷰했다. 또한 방대한 공공 기록과 법정 문서를 분석해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했다. 이 책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과 권력, 이민 정책이 어떻게 충돌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책을 펴내기 위해 정확히 얼마나 걸렸는지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략 3년 정도 걸렸어요. 그동안 우리는 다른 일들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시간을 내서 작업해야 했죠. 그러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책 작업에 집중하며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스털링이 ‘우리’라고 말했듯 이 책은 두 사람이 함께 쓴 작품이다. 공동 저자는 애리조나에서 활동해 온 탐사 저널리스트 주드 조페-블록이다. 두 기자는 애리조나에서 진행된 한 민권 소송을 취재하던 과정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이 사건이 단편적인 기사로 끝날 일이 아니라 더 큰 의미를 지닌 이야기라고 판단했다. 이후 그들은 취재 자료와 인터뷰를 공유하며 공동 취재를 이어갔다. 인터뷰와 취재 영역은 나눠 맡았지만, 책에서는 하나의 통합된 서술로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언론에서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같은 공인을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기자에게 전달되는 홍보성 보도자료는 대부분 그들의 코멘트로 끝난다. 새로운 정책을 시작한다며 “열심히 하겠다”는 식의 발언이 덧붙는 식이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작성된 기사 역시 형식적인 말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흔하다. 거칠게 말하면, 하나마나 한 말이다.
선거를 전후로 진행되는 후보자 또는 당선인 인터뷰를 통해 이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이 또한 인터뷰 대상자의 발언을 토대로 기사가 작성되기 때문에 이들의 본모습을 들여다 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스털링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입체적인 인물을 보여준다. 이 책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다. 첫 번째는 ‘미국에서 가장 거친 보안관(America’s Toughest Sheriff)’ 조 아르파이오다. 미국의 보안관은 주민 선거로 선출되는 공직자다. 단순한 치안 책임자를 넘어 지역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이미지는 강력한 이민법 집행자였다. 그는 언론과 대중 앞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런 이미지 덕분에 그는 단순한 지역 보안관을 넘어 전국적인 정치 인물로 떠올랐다.
당시 지역의 라티노 사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전국적인 아르파이오(National Arpaio)’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민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두 사람을 함께 비판하는 표현이었다. 애리조나에 아르파이오가 있다면 미국 전체에는 트럼프가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스타일은 그만큼 닮아 있었다.
게다가 아르파이오는 미디어를 활용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언론 노출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겉으로는 기자들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언론 보도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매우 능숙했다. 심지어 부정적인 보도조차도 홍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성향 또한 트럼프와 비슷한 점이다.
아르파이오를 몇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던 스털링은 그의 ‘친 언론’적인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가 인터뷰를 구걸하지는 않지만, 인터뷰를 좋아하고 기자들과 편하게 대화해요.”
“그렇군요. 지금도 전화하면 만나줄 정도인가요?”
“그럴 거예요. 그는 자신이 언론에 얼마나 자주 등장했는지 구글 알림을 통해 확인하는 사람이거든요.”
이런 아르파이오에게서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뜻밖의 모습이 책에서는 적지않게 묘사된다. 아르파이오의 이민 단속 정책이 라틴계 운전자들을 표적으로 한 인종 프로파일링이었다는 의혹을 다룬 ‘멜렌드레스 대 아르파이오(Melendres v. Arpaio)’ 재판. 스털링은 법정 한편에 앉아 그를 지켜봤다.
언론과 정치 무대에서 늘 강경한 이미지로 등장하던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보안관’은 그곳에서 온데간데 없었다. 한마디로 매우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스털링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법정에 앉아서 계속 그를 관찰하며 메모를 했어요. 아르파이오는 법정 안에서는 그냥 평범한 노인 같았어요. 법정을 나가고 나서야 다시 활기를 찾더군요. 정말 놀라웠죠.”
책에서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인물은 이민자 권리 활동가 리디아 구즈먼이다. 그녀는 아르파이오의 단속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름과 연락처를 기록했다. 법적 대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활동이었다. 단속 현장에서 사람들을 돕고 증언을 모으며 이민 단속에 맞서는 풀뿌리 저항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스털링은 인터뷰에서 리디아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리디아는 정말 진실하고 마음이 넓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아주 헌신적인 사람이죠. 그런 성향이 그녀의 DNA에 박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아르파이오와 구즈먼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늘 적대적인 모습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칼을 맞대다 보면 묘한 정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세상에는 전적으로 선한 사람이나 완전히 악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털링은 이 책에서 등장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포착해 낸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책 속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구즈만은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아 점심도 거른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와 블랙은 로비에서 2층으로 계단을 올라가 자판기에서 스니커즈 초콜릿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공간에 아르파이오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보안관님.” 그녀가 놀란 듯 말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 고마웠어요. 당신은 좋은 분이에요” 아르파이오가 답했다. 그는 구즈만에게 아바가 잘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아바는 강한 여인이고, 성경도 읽고 있다고 했다.
“왜 한 번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습니까?” 아르파이오가 물었다. “당신은 나를 만나러 오지 않더군요.”
아르파이오는 블랙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 “그녀는 참 좋은 분입니다.” (Sterling & Joffe-Block, Driving While Brown, p. 214)
스털링은 법정 밖에서 우연히 그들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했다. 이날 판사는 검찰에 아르파이오에 대한 형사 기소 여부를 검토하도록 사건을 넘길 가능성이 있었다. 당연히 구즈먼을 비롯한 라티노 활동가들은 공권력을 남용한 아르파이오가 재판에 넘겨지기를 바랐다. 두 사람은 각각 법원에 출석한 뒤 우연히 법정 밖에서 마주쳤다.
아르파이오가 구즈먼에게 감사를 전한 이유는, 그의 아내, 아바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구즈먼이 빠른 쾌유를 비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는다. 10년 가까이 대립해 온 인물들의 짧은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스털링은 이 장면이 거친 여전사 이미지였던 구즈먼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게 그녀의 진짜 모습이었어요.”
어쩌면 스털링이 이 책에서 포착하려 했던 것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세계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잠시 마주 앉아 인간적인 말을 건네던 그 짧은 장면. 그 속에서 우리는 권력과 저항,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얼굴을 동시에 보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