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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Jul 14. 2020

백수가 중매라니...

30대 중반 미혼남의 고초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창문으로 스미는 7월이다. 아직 내 통화기록엔 며칠 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저녁 8시 14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3개월 전 백수가 된 나는 엎드려 누워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고 있었다. '역시나 19세기 러시아 3대 문호다운 글솜씨군' 하며 무릎을 탁 친 후, 탁월한 문장력에 도취되어 활자와 한 몸이 되려는 찰나, 감미로운 정적을 깨는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덥석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활기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왔다.


"야, 오랜만이다, 뭐 하고 있었어?"

"아, 이거 누나 번호였구나, 몰랐네요"


나와 9살 차이 나는 사촌 누나였다. 최근 엄마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된 사촌누나는 굉장히 밝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는데, 이것이 비극의 불씨를 지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고 누나가 너 중매 서줄게"

"주... 중매요?"


TV에서나 듣던 '중매'라는 단어의 어감을 실질적으로 느껴보니, 심히 거북스러워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모든 것이 대마왕 엄마의 손길이 누나에게까지 뻗친 탓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중매요? 중매라 하면, 소개팅?"이라고 묻자, 누나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윗집에 친한 아줌마가 있는데 그분이 딸이 2명인데, 첫째는..." 하며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냈다. 나는 그런 누나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내며 "누나, 저 소개팅할 생각 없어요. 소개팅할 상황도 아니고요" 라며 전화를 끊을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양보할 기세가 없는 누나는 "너도 나이가 이제 서른 중반이잖니, 갈수록 만날 기회도 없어진다, 이모(우리 엄마)가 너 연애하기를 얼마나 바라는데" 라며 이미 상대방과 상대방 부모에게 승낙까지 받아놓은 상태라고 했다. 한데, 누나는 내가 백수인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당연히 자존심 강한 우리 엄마가 말했을 리가 없지...


나는 단전에서 끌어낸 깊은 한숨을 쉬며 고뇌하기 시작했다. '백수라고 말해? 말어? 그래, 말하자,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뿐이야'라고 다짐한 순간, 엄마의 형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윽고, 온몸이 마력의 불기운으로 활활 타오르던 대마왕의 형체가 어느새 슬픔에 흐느껴 우는 가녀린 소녀의 모습으로 변모해버렸다. 툭하고 건드리면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질 것만 같은 소녀를 향해 나는 울분을 토해냈다.


'소녀이자 나의 어머니이신 분이여! 어찌하여 저 몰래 작당모의를 한 것입니까!'


'아들아, 네가 백수임을 고백하면 이 어미의 혼은 죽어서도 승천하지 못할 것이다. 너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귓전에 대고 '중매'라는 단어를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반복 재생할 것이니, 심사숙고하여라'


라고 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수년 전부터 '남은 여생은 21세기의 효녀 심청이가 된 심정으로 보내리라'하며 굳게 다짐했던 나는 결국 수화기 너머로 "......" 하는 탄식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승리를 거머쥔 듯한 음조로 " 나온 사진 하나만 보내봐"라며 전화를 끊었으나, 난 사진은커녕 심청이가 되어 인당수를 향해 이 한 몸 내 던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에 일을 끝마친 엄마가 집에 들어왔다. 엎드려 누워 독서가 빠져 있던 나를 향해 엄마가 말했다.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이 나와 떡이 나와! 연예를 해야지, 연예를!"

안 그래도 한바탕 하려던 참에 선제공격을 맞은 기분이었다.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뻗친 나는 "중매를 선다니, 어쩐다니 하는데,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라며 다짜고짜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나는 별말 안 했는데? 걔는 왜 그렇게 나서고 그런다냐"라며 시치미를 뗐지만 나는 포착하고 말았다.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엄마의 입꼬리가 순간 지그시 올라갔던 것을.


'이 아줌마의 소행이 확실하군'


괘씸한 생각이 들어 "백수가 소개팅이 말이나 돼?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며 소리치자 엄마는 "평생 백수 할 거냐!" 라며 되려 윽박질렀다. 그래서 나는 "그래! 평생 백수 할 거다!" 라며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직장이 있어도 할까 말까 한 소개팅을... 게다가 이건 맞선이 아닌가' 중매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휘저으며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후끈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냉수마찰을 시작했다. 한결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모든 상념을 씻어낸 듯한 개운한 마음으로 온몸 구석구석의 물기를 닦아낸 후, 휘파람까지 불며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쯤, 등골이 서늘한 것이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수건 사이로 빼꼼히 내다보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엄마의 가지런한 치아가 유난히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승리의 빛이었다.


"아가씨 연락처 문자로 보냈다, 확인해봐"

"하......"


백수가 소개팅을 나간다는 무모함이란, 칼과 방패로 중무장한 전쟁터에 빤스 바람으로 진격하는 어리석은 병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 상대방과 예의를 갖춰 연락을 주고받고 있지만, 실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화병이 도질 것만 같다. 삼일 남았다. 백수라는 사실을 밝힐 예정이지만 누나와 엄마를 욕보이게 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면 당일날 이 모든 스토리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야 할까.


희대의 난제 앞에 선 나는 기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깊은 한숨소리가 허공을 맴돌다 다시금 폐 속으로 스며든다. 30대 중반의 미혼남, 게다가 백수라는 타이틀까지 보유한 자의 고초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법.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마저 읽고만 싶은 울적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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