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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Jul 19. 2020

백수가 중매라니... 2편

30대 중반 미혼남의 고초

딱히 쓸만한 소재도 없지만 딱히 할 일도 없는 백수 신세라 여느 때와 같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며 '이놈의 코로나는 가실 생각을 않는군'이란 생각을 흘려보낸 뒤, 브런치에 접속해보니 '작가님, 중매의 결과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소개팅은 어찌 되었나요' '큰일을 보다만 기분입니다, 하루 빨리 2편을 써주신다면 대단히...'와 같은 댓글들로 화면 가득 도배되어, 일일이 답장을 해주느라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셔 파스를 칭칭 감은 채로 커피를 연거푸 두 잔째 마시고 있다, 는 건 나의 상상일 뿐이고(흑흑), 


추적추적 비 내리는 감성적인 저녁임에도 글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에휴, 글감이 없을 땐 이런 거라도 써야지'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백수의 중매 경험기 2편을 이제 막 개막하려 한다.


여태껏 필자의 글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끝내는 동물원 기린의 먹이를 넘볼 수준으로 목이 늘어나 신종 기린으로 분류되어 생태계를 교란시킬 위기의 경계선을 밟고 오신 독자님들은 주목해주시길.


브런치 독자만을 위한 내가 그린 기린 그림


중매라는 단어는 내 온몸에 두드러기를 유발할 수도 있으니, 소개팅이라 칭하겠다. 여하튼, 소개팅을 하루 앞두고 백수임을 어떤 방식으로 고백해야 할까, 하고 여러 방도를 찾아봤는데... 이럴 수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 답이란 '백수라는 사실을 밝히면 안 된다'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백수임을 상대방에게 말한다 > 상대방의 어머니의 귀에 들어간다 > 상대방 어머니가 사촌누나에게 따진다 > 사촌누나가 화들짝 놀라며 우리 엄마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 백수 아들을 둔 엄마는 고개를 떨군다'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소개팅 자리에 나가서 백수임을 밝힐 바에야, 애초에 사촌누나에게 '난 백수인 관계로 소개팅을 거절하겠소'라고 깔끔하게 언급했다면 소개팅 문제로 이렇게 까지 골머리를 썩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난 백수임을 숨기고 최대한 매너 있게 소개팅에 임하고 오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단! 투르게네프의 명작 <첫사랑>의 히로인 '지나이다'와 같은 여인이 등장하여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고 온몸의 피가 용솟음치다가 끝내는 멀어버린 두 눈에 하트를 장착한 채로 뜨거운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는, 정말 1%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백수임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만남을 이어갈 생각이라면 첫 만남부터 거짓말은 아니 되니까요).


토요일 오후였다.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무심코 아랍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프랑스의 어느 이방인이 생각 나는 무더운 날씨였다. 마스크를 쓴 탓에 인중과 콧잔등 위로 맺히는 구슬땀을 연신 닦아가며 강남으로 향했다. 


우리는 우선 커피를 마시기로 약속했었다. 미리 도착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음, 코로나의 열기가 대단하군'하며 북적거리는 커피숍들을 탐방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개팅녀가 도착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며 마스크를 벗었다. 새하얀 커튼 같은 마스크가 그녀의 앙증맞은 양쪽 귀로부터 흘러내리며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 나의 지나이다!'라고 외치며 그대로 발길을 돌려 아늑한 내방으로 돌아가 엎드려 누워 <첫사랑>을 마저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1%의 기적이란 일어나기 어려운 법이다(제가 주제 모르게 눈이 높습니다).


그녀는 수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나름 대화도 잘 통하고 심성도 고운 느낌을 주는 참한 여성이었다. 우린 커피를 마신 후 스페인 요리에 맥주를 한잔씩 곁들이고는 헤어졌다. 그렇게 끝났다. 이로써 일주일간 나를 괴롭히던 사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오랜만에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황리에 마치고 퇴근하는 직장인의 기분으로 집에 도착한 나는, 죄수복을 벗어던지듯 옷가지를 풀어 재끼며 환희에 젖어 울부짖었다. 


"프리덤!!!!!!!!!"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로부터 다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만에 하나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를 소개팅녀에게(0.01%의 희박한 확률이지만).


어떠한 사정으로 나오셨는지 잘은 모르지만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스페인 요리와 맥주는 일품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셨죠.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조금은 멋쩍으나 아마도, 분명, 단언컨대 좋은 사람 만나실 겁니다. 당신은 저에게 연애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안겨주신 혁명적 선구자이자, 이렇게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영감을 불어넣어주신 뮤즈나 다름없으니까요.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연락을 주신다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저의 불후의 명작 <평범한 사람이 쓴 평범한 에세이>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용도는 냄비받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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