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관희 Aug 01. 2020

탄산음료를 좋아하세요...

독서

가까운 지인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통은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하던가, 아니면 '브... 뭐 시기? 부랄스?' 라며 짜증이 가득한 두 눈으로 쏘아볼 것이다. 간혹 어쩌다 한 명쯤은 "음, 브람스의 음악보다는 화성 체계의 혁신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에 새로운 종합예술을 창조했다고도 볼 수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브람스(음악가)' 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책 제목)' 던 일상적 잣대를 들이댈만한 주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브람스보단 아이유

하지만 '탄산음료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열에 아홉은 만화 영화 <캔디>의 주인공 같이 사슴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 나온 김에 편의점에 좀 들려서 탄산 한잔 때릴까?" 하고 반색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웬 브람스와 탄산음료냐고? 사실, 둘 사이엔 일말의 상관관계도 없다. 단지, 얼마 전에 읽었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급작스레 떠올라 글의 도입부에 응용해봤을 뿐이다. 필자는 글에 대한 영감이 메말라 있을 땐 이런 식으로 마구 가져다 쓰곤 한다.


제목에도 써놨다시피 탄산음료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들 인정하겠지만 탄산음료계의 왕좌는 단연 콜라가 차지하고 있다. 특히나 북극곰과 산타할아버지도 "으흠~"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즐겨 마신다는 빨간 콜라가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목 구녕에 찌릿한 고통을 안겨주는 거무튀튀한 그 액체를 사람들이 왜 그리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탄산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모금씩 꾸역꾸역 넘겼던 내 입장에선 심히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탄산음료는 몸 건강에도 썩 좋지 않다.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도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야심한 밤, 북극곰은 스러져가는 빙하 위에서 치통으로 인해 "크와왕" 하고 울부짖으며 잠을 뒤척이고, 산타 할아버지는 성인병 해결에 대한 문제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가 "음, 내일은 건강검진을 꼭 받아야겠군" 하고 검진센터의 전화번호를 뒤적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마트나 편의점의 음료 코너에 반 이상을 자리 잡은 탄산음료가 자신을 집어달라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망설임 없이 우유나 커피, 혹은 과일음료를 품에 안는 스타일이다. 탄산을 마시면 갈증 해소는커녕 짓궂은 요정들이 목 구녕 안에서 칼부림을 일으키는 것만 같다.


어디 그뿐인가. 인위적인 단맛이 입안을 텁텁하고 찜찜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느새 진득하고 끈끈해진 침은 삼키고 삼켜도 혀 안쪽에 기분 나쁜 흔적을 남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목 안쪽 깊숙이 설탕 덩어리가 걸린 느낌이랄까. 이쯤 되면, 독자님들은 내가 탄산을 얼마나 기피하는지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랬던 내가 약 반년 전, 아주 사소한 계기로 탄산에 빠져버렸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아니 나란 인간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날은, 악뮤 콘서트 하루 전날이었다. 일산에 사는 친한 동생이 내가 있는 촌구석 방화동까지 몸소 행차한 날이었다.

험상궂은 얼굴(자꾸 보면 귀여운 얼굴)에 190cm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동생은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형, 나 어제도 과음했어"라고 말하는 몰골이 살짝 누렇게 떠 푸석푸석해 보였다. 조금은 신경이 쓰였으나 원체 건강한 놈이라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형으로서(얼굴은 내가 더 어려 보인다) 횟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선적으로 해장을 위한 매운탕을 주문했다. 그러자 불쑥 "형, 콜라! 콜라도 하나 시켜줘" 라며 탄산을 요구한 동생은 곧이어 나온 콜라를 투명한 유리잔에 가득 채우고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놈이 탄산을 좋아했었나...'라는 생각이 들어 "오자마자 갑자기 웬 콜라냐?"라고 묻자, 동생은 질문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끄윽~하고 속 트림을 하더니, 나에게 길이길이 남을 촌철살인 같은 명언을 남겨주었다.


"형, 해장엔 탄산이 최고야"


나는 그 순간 보았다. 동네 누렁이처럼 누렇게 떴던 동생의 얼굴에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을. 동생은 연이어 한잔을 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양지바른 곳에 핀 해바라기처럼 화사하고 귀여운 얼굴(사실은 험상궂은)이 활짝 피어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있지도 않은 숙취가 말끔히 가시는 듯한 상쾌함을 경험했다.

우리는 사뭇 진지하게 서로의 개똥철학들을 공유하며 각 소주 2병씩을 마시고, 2차로 맥주도 한잔씩 하고는 깔끔하게 헤어졌다.


다음날 일어났더니 머리가 살짝 띵한 것이 숙취의 기운이 느껴졌다. 악뮤 콘서트를 같이 보러 가기로 한 친구가 차를 끌고 이미 집 근처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는 슬금슬금 기어나갔다. 나를 보자마자 친구는 "이 새끼, 어제 또 술 처먹었구먼"이라 하길래, 가볍게 무시해주고 편의점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아무 탄산이나 골라 집고 나왔다. 복숭아 맛 탄산음료였다(사실은 1+1이어서 골랐다, 검소함이 몸에 밴 남자다).

친구에게 음료 하나를 건넨 나는 '칙'하고 뚜껑을 딴 후에 허겁지겁 들이키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갈기갈기 찢을 듯한 고통을 꾹 참고 견뎌내며 단숨에 넘겨 버렸다.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이 새끼, 갑자기 왜 안 먹던 탄산을 먹냐?"라고 하길래, 나는 친구의 얼굴 정면을 향하여 꺼억~ 하고는 향긋한 미소를 지으며 어제 나의 심금을 울렸던 명대사를 날려 주었다.


"야, 해장엔 탄산이 최고야"


복숭아 맛 탄산음료 덕분에 그날 아주 쾌척한 컨디션으로 악뮤 콘서트를 즐기고 왔다. 하지만 어느새 난 습관적으로 탄산음료를 집 냉장고에 쟁여 놓고 사는 탄산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숙취에 대한 처방용으로만 마시다가, 차츰 술에 타서 마시기 시작하여, 끝내는 물 대용으로 마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신 거울로 비친 나의 충격적인 몸뚱어리를 보고 말았다. 그것도 달랑 속옷 하나만 걸치고 있었으니, 팬티의 허리춤을 타고 흘러내려 일순 바닥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뱃살을 직관한 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는 콜라를 좋아하는 산타 할아버지가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자네가 안성맞춤이군, 23일 저녁 나에게 루돌프를 빌리러 오게나"라고 할 것만 같아 탄산을 끊게 되었다.


하나, 탄산을 끊은 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나의 뱃살은 그대로다.

문제는 탄산이 아니라 알코올이라는 사실에 오늘도 울적한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백수가 중매라니... 2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