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우리가 여행 가는 곳,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가고시마"
"자꾸 잊어버려"
"자, 쉽게 알려줄게, 이렇게 외워봐"
가고싶은! 가고시마!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섬 중,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을 규슈라고 한다. 규슈는 후쿠오카, 나가사키를 비롯한 크고 작은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밑쪽, 우리나라로 치면 전라도 해남과 같은 위치에 가고시마라는 지역이 있다.
가고시마와 연이 닿은 것은 생애 첫 가족여행을 기획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 우리 세 식구는 해외여행은 물론 이렇다 할 국내여행 한번 하지 못했다. 원인은 우리 집안의 결정권자이자 나와 서열 1,2위를 다투는 엄마 때문이었다.
"지금 한창 벌어도 시원치 않은데 이삼 일씩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호기롭게 여행 이야기를 내뱉었던 나는 쩝 하고 입맛만 다시며 돌아섰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엄마를 바라보던 아빠도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여행 갈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집안 경제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가족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 몇 년 간 우린 열심히 벌었다. 어느 날 나는 빨갛고 커다란 돼지 저금통 한 마리를 업어와 아빠에게 내밀었다.
"이거 모아서 우리 가족 여행 가자"
푼돈이지만 아빠와 매일 돼지의 끼니를 챙겼다. 어느새 돼지는 무거워졌고 배도 빵빵해져 더 이상 밥을 먹지 않았다.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굳은 의지로 엄마에게 다시 도전했다.
"엄마, 우리 여행 가자, 해외여행!"
"지금 한창 벌어도 시원치 않은데 이삼 일씩 가게 문을..."
나는 엄마의 말을 잘라먹으며 공격적으로 대꾸했다. 협박에 가까웠다.
"이번에 안 가면 나 죽을 때까지 엄마랑 여행 안 간다! 진심이야, 얄짤없어!"
엄마는 당황했는지 잠시 멈칫했고 아빠는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빠의 눈빛을 통해 '장하다, 내 아들' 이란 시그널을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돈은"
"아빠와 내가 돼지 한 마리를 지극정성으로 길러놨지"
"3일 이상은 안돼!"
"2박 3일! 마지막 날은 아침 일찍 오는 비행기로 잡을 테니 걱정 마"
꿈에 그리던 가족여행. 곧 죽어도 가게를 3일 이상 닫을 수 없다는 엄마의 의견을 반영하여 나라는 가까운 일본으로, 두 분 모두 뜨거운 물에 몸 담그는 행위를 좋아하기에 여행은 온천여행으로 정했다.
생애 첫 가족 여행을 계획하는 일은 즐거웠다. 어딜 가야 좋을까란 고민보다 어딜 가도 좋겠다는 기대감에 온종일 들떠 있었다.
수많은 온천 지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비교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특색과 장단점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가고시마란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가고시마? 왠지 귀여움이 묻어나는 이름이었다. 굵은 네임펜으로 '가고시마'라는 글자를 둥글게 둥글게 써보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입을 벌려 한 음절씩 또박또박 발음해보았다. 가, 고, 시, 마.
착착 감기는 맛은 없어도 묘하게 입안을 맴도는 중독성이 있었다.
하루 종일 가고시마의 여행정보를 파헤치며 혼자 소곤거렸다. 가고시마... 가고시마... 나중엔 아예 노래를 불렀다. 가고싶은~ 가고시마~ 가고싶다~ 가고시마~. 나의 부름에 답장이라도 하듯 어느새 가고시마는 내 마음속에 눌러앉아 꼭 가고 싶은, 꼭 가야만 할 것 같은 이름이 되어버렸다.
비행기를 예약하고 마음에 드는 료칸의 예약까지 끝마쳤다. 남은 일은 아직 가보지도 못한 가고시마를 상상하며 행복에 젖어드는 일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가고시마를 찾아보며 마음속으로 가고시마를 부르짖었다.
여러 관광지의 사진 속에 활짝 웃는 세 식구의 얼굴을 집어넣어 보고, 온천욕을 즐기며 원숭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 예쁜 유카타를 입고 푸짐한 가이세키 정식을 폼나게 먹는 가족의 풍경을 그려봤다. 상상만으로도 가벼운 깃털이 되어 하늘 위를 살랑살랑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한 달 후면 이 모든 것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으리라.
설렘에, 그리고 달콤함에 취한 밤들이 한 달 내내 이어졌다. 이래서 모두들 여행을 가는 걸까. 여행의 이유를, 기다림의 미학을, 그리고 행복은 심오한 철학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곰곰이 헤아려본 한 달이었다.
우리 가족은 기리시마 시의 마루오라는 작은 온천 마을에서 이틀을 보냈다. 그곳은 힐링을 간직한 마을이었다. 한적한 거리의 여유로움과 미세먼지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온천의 수증기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삼나무로 둘러싸인 주변 풍광은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기운이 넘쳐나는 아빠, 여느 때보다 보드라운 미소를 띤 엄마와 함께 따스한 추억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밤, 셋이 나란히 누워 찰떡같이 달라붙는 료칸 이불을 덮었을 때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엄마, 어때? 여행 좋지?"
캄캄한 어둠 속, 테라스를 비추는 백열등의 노란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있네"
부모님이 잠든 깊은 밤,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꿈만 같은 시간들을 조금만 더 붙잡아두고 싶어 수건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왼쪽 편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개인 온천을 바라봤다. 온천수의 표면 위로 백열등의 노란빛들이 부서져 반짝거렸다. 나는 고요함 속에 몸을 담갔다.
시원한 밤공기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던 순간들, 촘촘히 박힌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투명했던 밤하늘, 냉장고에서 갓 꺼낸 에비수 맥주의 풍미와 귓가를 살랑이던 사랑스런 아이코의 음악. 채우지 못한 내 안의 빈 공간들로 가고시마의 밤이 깊숙이 흘러들었다.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있네.
가고시마를 다녀온 후, 진한 유황냄새가 티셔츠에 깊숙이 배었지만 차마 옷을 빨 순 없었다. 시큼 구수한 냄새를 맡으면 맡을수록 선명하고 또렷하게 가고시마의 정경이 눈 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고, 그때의 내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숨 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흥분한 변태처럼 킁킁 거리며 옷에 코를 박고는 그리운 가고시마를 떠올렸다. 여행을 계획하던 첫 순간부터 온천에서 황홀한 밤을 보내던 마지막 순간까지.
지나 온 여정을 회상하며, 추억 속 깊게 새겨진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육중했던 삶의 무게를 조금씩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다.
여행이란 상상이 현실이 되는 마법이다. 그 마법의 과정 속으로 스며들면 곳곳에 숨어있던 작은 행복들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나는 그 작고 소중한 것들을 위해 여행을 꿈꾸며 살아간다. 실수로 유황냄새가 밴 티셔츠를 빨아버렸더라도, 더 이상 엄마가 쉽사리 설득당하지 않더라도,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로 인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상상이 현실이 되는 마법의 시간을 기다리며 오늘도 소곤거린다.
가고싶은 가고시마. 가고싶다 가고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