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둘째 구레 입양, 러시안 블루
자동차 공장 정비원은 아침부터 밀려드는 일감에 지쳐 있었다. 피곤을 털어내기 위해 공장 한편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풀 숲으로부터 쓱 다가왔다. 작고 검은 생명체는 가까이 다가와 눈을 들어 정비원을 응시했다. 지구를 담은 듯한 녹색의 동그란 두 눈. 집을 찾기 위해 외치고 또 외치다가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외치려다 찢어진 성대에서 간신히 새어 나오는 -냐옹-하는 작은 쉰 소리. 작은 회색 고양이는 정비원 앞에서 올려다보며 아픈 성대를 억지로 쥐어짜 내어 간신히 울었다. 뱃가죽은 몸에 달라붙은 것처럼 쪼그라들어있었고 털은 비라도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말을 듣지 않아도 배고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먹을 것을 조금 내어주니 씹지도 않고 급히 마시듯 삼켰다. 며칠은 제대로 못 먹은 듯했다. 주린 배를 채우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리에 와서 몸을 비벼댔다. 사람의 손길을 아는 아이다. 품종 묘이고 사람을 잘 따르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키우던 아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후로 며칠간 이 아이는 공장으로 왔다. 밥을 먹고는 공장 한편에 기대 잠을 잤다. 이대로 길에 둘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데려가기에는 이미 집에 아이들이 있어서 어려웠기 때문에 아내와 이야기해서 '벼락이'라는 이름을 붙여 카페에 홍보글을 올렸다. 임시보호처는 금방 찾을 수가 있었다. 베란다이긴 하지만 밥과 화장실. 깨끗한 물이 있는 집에서 새로운 집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벼락이는 금세 새 집에 적응했다.
아래는 홍보글에 있던 내용이다.
벼락이는 어느 날 갑자기 경기도 광주의 한 외딴 공장에 나타난 아이예요. 사람을 좋아해 처음 본 사람에게도 부비부비 하고 밥을 주니 많이 허기졌는지 허겁지겁 먹고는 공장 한편에서 잠을 자곤 했대요
지금은 고양이 품종을 따지는 것을 극대로 경계하지만 강아지를 키우던 관성이 있던 아내는 품종들에 관심이 많았다. 관심 있는 품종이 한 둘은 아니었지만 그중엔 러시안 블루도 있었다. 사람과 깊은 유대를 맺기 때문에 정신병원에서도 기르곤 한다는 회색의 멋있는 고양이. 러시안 블루는 날쌔게 생긴 외모와 독특한 털 색 덕분에 미묘로도 유명했고 실제로 많은 광고에서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시로의 외로움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을 때, 아내의 눈에 러시안 블루 유기묘 입양 글이 들어왔다. 이미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빠르게 결정을 내렸고 입양 신청서를 냈다.
이제는 임보와 보육 경험이 쌓이다 보니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어리고 좋은 외모를 지녔거나 품종묘의 경우 입양을 보내는 것이 수월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벼락이는 2~3살 정도로 비교적 어린 편이었고 유려한 외모의 러시안 블루였기 때문에 입양 신청 문의가 꽤 있었다.
유기묘의 입양은 보통 선착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한 번 유기된 아이를 입양 보내기 때문에 아이의 고통을 고려해서 파양 가능성을 최대한 고려한다. 아이의 행복을 지켜줄 사람, 가급적 불행해질 가능성이 낮은 사람에게 보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연령, 기혼 여부, 경제력과 같은 외부에서 보면 다소 불편해 보일 수 있는 요건들을 고려해서 입양을 보낸다. 심지어 해당 집에 방문해서 면접을 보기도 한다.
우리도 구레 입양을 위해 신청서를 정성스럽게 적었고 면접을 봤다.
시로를 입양하면서 과할 정도로 도구들을 들여놔서 방묘문, 화장실, 음수대, 급식대는 물론 각종 스크래쳐와 장난감까지 구비를 해놨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면접 때 시로가 낯선 사람에게도 친화적으로 군 것도 플러스였다. 큰 결격사유 없이 벼락이의 입양이 결정됐다.
그리고 며칠을 기다려 벼락이 와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벼락이는 시로와 격리된 방에서 케이지 문을 열어주자마자 쏜살같이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가려다가 목에 두르고 있는 넥 카라에 걸려 들어가지 못하고 낑낑댔다. 지금보다 유독 검어보이고 고슴도치처럼 삐죽거리던 털. 살이 빠져있어서 유독 더 크게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는 표정. 그리고 집에서 두 달 정도 지내면서 살찐 시로와 다르게 안타까울 정도로 말라있던 몸.
벼락이는 처음 들어보고 "왜 이렇게 가벼워?"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무게를 예상하고 힘을 준 근육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언가 빈 것처럼 가벼웠다. 성묘가 3kg이 채 나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말라있던 것일까.
게다가 접종을 하고 와서 넥 카라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쓰러움이 배가 됐다.
하지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두고 거실에서 보호자님과 대화를 나누고 방문을 열어보니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 보인 두려움과 불안함은 이미 어디 가고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자기 자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원래 고양이는 이런가? 시로에 이어서 벼락이 까지 이러다 보니 그런 착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겪어보니 유독 이 두 아이가 특이한 케이스였다.
우리는 이 아이에게 '구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로가 일어로 하얀색이었기 때문에 이 아이에게도 비슷한 느낌의 이름을 주고 싶었는데 일본어로 회색이 그레이, 발음으로는 구레- 라는 것을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너무 단순하게 지어주는 건가 싶기도 하다. 검은색이 왔으면 쿠로였을까? 그랬을 것 같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시로는 경계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집에 고양이 냄새가 들어왔다. 내가 들어가던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에 누군가 있다. 시로는 출입 금지된 방문 앞에 보초병처럼 서서 냄새를 맡다가 '또' 긁기 시작했다. "저 안에 누가 있어. 내가 해결해 줄게. 이 문 좀 열어줘."
우리 부부는 구레가 오는 것이 결정됐을 때부터 합사 공부를 시작했다. 고양이 합사는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었다. 지금은 8~9번의 합사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합사를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앞으로 평생 같이 지낼 두 아이가 이번 합사로 잘못된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시작된 실전. 각오와 동시에 시로의 합사는 이미 시작됐다. 그리고 참으로 어려운 합사가 시작됐다.
(합사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