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 한다면 하는 여자
알고리즘 때문인지 아님 정말로 시대가 변한 건지 요즘 부쩍 장기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혼자 여행은 누구나 언제든 떠날 수 있을 만큼 진입장벽이 내려간 걸로 보이고 우리처럼 부부가 여행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심지어 차를 타고 지구를 횡단하거나 캠핑카를 이용해 가족이 여행하는 경우도 봤는데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까. 오히려 예전보다 신경 쓸 것들이 더 많아졌다. 좋게 말하면 가진 것, 지켜야 할 것이 더 많아진 걸 테고 안 좋게 말하면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2019년에 약 200일간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어느새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공백을 나름 치열하게 살아내면서 가진 것도 지킬 것도 많아졌다.
복직을 하고 일에 적응하느라 그리고 잘 해내고 싶어서 온 정신을 쏟았다. 빚잔치가 열렸지만 내 집이 생겼다. 친동생이 결혼하여 사랑스러운 조카와 함께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타지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는 미뤄뒀던 무릎 수술을 하시고 이제 퇴직을 하시나 했지만 아직 더 할 수 있다며 또다시 일터를 찾아 타 지역으로 가셨다. 어머니가 집에 혼자 계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다시 떠나기로 했던 우리의 두 번째 여행이 1년, 2년 미뤄지고 있었다. 날짜가 밀리다 보니 그리고 나이가 들다 보니 불안 요소가 가중되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야 할 시기에, 심지어 평생을 프리랜서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는데 다시 떠나도 되는 걸까. 학생들을 만나는 직업이니만큼 나이가 들수록 나의 경쟁력은 떨어질 텐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가장 큰 불안 요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의 건강상태였다. 발목이 좋지 않아 걱정이 많던 그녀는 점점 통증의 빈도가 잦고 상태가 악화되는 게 체감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수술을 해야 할지, 그리고 수술을 한다고 해서 다시 괜찮아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이어야 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무릇 세계여행이라 함은 골자와 청음만으로도 낭만이 넘치지만 실상은 고행의 연속이다. 생각 이상으로 튼튼한 두 다리와 체력을 필요로 한다. 보통은 젊을 때 열심히 일하라고 하지만 우리 여행인들은 젊을 때 열심히 여행해야 한다고 하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지난 세계여행 때는 정말 부단히도 걸었고 힘들었고 때로는 지치기도 했지만, 덕분에 휴양이 아닌 정말 여행다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발목 걱정에 산책도 부담스러운 마당에 여행이 가능할까? 무작정 떠난다고 해결이 될까?
...
해결이 되었다. 그녀는 되게 한다.
우리의 두 번째 세계여행은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흔히 '한 달 살기'라고 표현하는 형태로 한 나라에 혹은 한 도시에 오랫동안 머물며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로 했다. 예전처럼 여러 나라의 예쁘고 멋진 곳들을 빠짐없이 가볼 수는 없기에 어쩌면 퇴화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정적인 불안 요소까지 해결하며 우리는 분명 진화에 성공했다.
바로 일이다. 해외에서도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
돌이켜보면 6년 전 세계여행을 다니던 그 시간들이 모두 다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새롭고 경이롭던 시간은 오히려 순간에 가까웠고 대부분의 시간은 무료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도시 간이든 나라 간이든 지루한 이동의 연속이었고 투어와 같은 어떤 이벤트가 있지 않은 이상 숙소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그 또한 평화롭고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돈으로 생각의 무게추가 옮겨 가는 순간 모든 것은 당위성을 잃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여행은 더 이상 여행이 아닌 현실이 되었고, 현실에서의 생산 없는 소비는 쉼이 아닌 나태였다. 그리고 나태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다신 오지 않을 그 값진 시간 속에서 부단히도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소중한 시간을 보전할 수 있다.
먼저, 부모님들께 알렸다. 안정적으로 살길 바라는 분들이기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회사와 조율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이 아닌데도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처음이 아닌 덕에 받아들이기는 더 수월해 보였다.
정들었던 차도 팔았다. 흔히 집 팔고 차 팔고 떠난다는데 집은 안 팔아서 다행이랄까.
그 외의 자잘한 것들을 정리하고 보니 막상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냥 조금 긴 여행을 떠나는 것뿐이다.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마흔이 되면 삶의 의미 정도는 꽤나 깨우친 불혹의 성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나이만 먹은 마흔 살 어린이는 여전히 스타크래프트와 무협 만화를 즐기며 이곳 말레이시아에 와 있다.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삶의 의미를 경험에서 찾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는, 그래서 여행해야만 하는 여행에 미친 여자와 함께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렇게 두 번째 세계여행을 떠나 이곳 말레이시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