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 You ruined my life
하늘 색도 동네 분위기도 먹을 것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페낭에서의 한 달이 금세 지나가고 있었다.
디지털 노매드를 막상 하다 보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에 직면했다. 평소 즐겁기만 했던 계획 세우기가 이렇게 고통을 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5월 연휴에 가기로 한 휴가지를 알아보느라 블로그와 유튜브로 몰디브, 태국, 인도네시아까지 갈 수 있는 휴양지는 다 물색하고 다녔다.
오히려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보니 어떤 곳으로 가야 후회가 가장 적을지 여러 기회비용을 고려하면서 정보를 얻고 후기를 읽느라 2주 남짓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최종 후보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보다 더 큰 선택의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바로 다음 한 달 살이 장소를 어디로 정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5월 초에 휴가를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쿠알라 룸푸르로 돌아가는 게 맞지만, 현재 지내고 있는 페낭에서의 만족도가 너무 높았다.
지난 글에서 남긴 것처럼,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부터 직관적인 대중교통까지 이방인이 지내기에도 너무나 안전하고 편리했고 주말마다 조지 타운에 놀러 가서 각종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먹어보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비용 문제였다. 쿠알라 룸푸르와 페낭의 생활 물가나 교통비 등은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결정적으로 페낭의 숙소 비용이 쿠알라 룸푸르보다 좀 많이 들었다. 업무를 해야 하는 디지털 노매드가 아니라면 스튜디오 형의 원룸이나 투룸으로 숙소 비용도 충분히 줄일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업무 공간이 있어야 했다.
게다가, 식사도 거의 숙소에서 해 먹다 보니 주방까지 잘 갖춘 그런 좋은 컨디션의 숙소가 꼭 필요했다. 그런 조건을 찾다 보니 페낭의 숙소비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결국 그런 숙소의 비용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다른 것들을 아끼더라도 페낭에 머무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숙소를 예약하려는 찰나 정말 거짓말처럼 에어비앤비 앱의 알림이 울렸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쿠알라 룸푸르의 숙소 중 한 곳에서 장기 숙박객에게 할인을 제공한다면서 20%에 가까운 할인가를 제시했다. 그냥 넘기기에 20%는 너무나 달콤했다. '감탄고토'라기 보단 '고진감래'의 단맛이었다. 어차피 5월의 휴가를 위해서도 그렇고 6월이 되면 90일 비자 만료로 인해 말레이시아를 떠나야 하므로 쿠알라 룸푸르로 가서 공항 근처에 지내는 게 맞는 거라며 합리화했다.
그렇게 우리는 페낭을 뒤로하고 다시 쿠알라 룸푸르로 돌아가기로 했다.
새로운 숙소의 호스트는 입실 날짜가 되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정확한 입실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고, 우리는 버스 탑승시간과 예상 도착시간, 그리고 숙소 도착 예정시간을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전의 숙소들은 셀프 체크인 시스템으로 열쇠함에 있는 열쇠를 호스트의 안내대로 수령하여 알아서 체크인/체크아웃하면 되었는데, 이번 숙소는 호스트가 직접 우리를 맞이하고 이것저것 알려줄 요량인 것 같았다.
입실 당일, 다행히 우려했던 교통 체증이 있지 않아서 예정된 시간에 숙소에 잘 도착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호스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중국계 말레이인 아주머니였다. 어색한 공기를 뚫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까지 올라갔다. 이전 숙소들보다 비교적 좁고 오래되긴 했지만 사진과도 비슷했고 꽤 괜찮아 보였다. 다만 이전 숙소들은 게스트를 받아 숙소로 운영하기 위해 관리한 집의 느낌이라면, 이번 숙소는 집주인이 거주하다가 집을 비워주는 느낌이랄까? 생활의 흔적이 좀 진했다.
하지만 거실과 방의 분리도 잘 되어 있었고, 와이파이 속도도 준수했다. 우리는 일단 업무 환경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갖출 건 다 갖춰 보이는 주방, 화장실 두 개, 나름 뻥 뚫린 뷰까지 가성비가 좋은 것 같아서 안도하고 긴장이 풀렸다.
이런저런 숙소 안내를 들은 후, 호스트를 보내고 짐을 풀려고 하는데 갑자기 같이 식사를 하겠냐며 제안을 해왔다. 페낭에서 쿠알라 룸푸르까지 7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온 데다 끼니도 거른 상태라 좀 쉬다가 편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어 호스트를 따라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주변에 이런 가게들이 있고 시장이 있고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친절에 감사했고 현지인이 알려주는 로컬 식당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식당에 도착하고 보니 해산물을 주로 다루는 중국식 레스토랑인 것 같았는데 사람들이 제법 많고 메뉴도 정말 많았다. 호스트가 알아서 메뉴를 주문하는데 직원과 중국어로 아주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메뉴에 대한 설명을 하나하나 다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 틈을 이용해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 친절한데? 저녁식사까지 사 주는 건가?"
"나도 그게 궁금한데, 적응이 안 되네."
"이곳 문화 중의 하나인가? 사 준다고 해도 더치하자. 좀 부담스럽다."
"근데 현금 있어? 이체를 못하니까 좀 애매해질 것 같기도 하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메뉴 주문이 끝났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아주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말주변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언어 문제로 인해 소통이 힘들다 보니 굳이 먼저 질문할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특히 중국식인지 알 수 없는 억양과 발음이 알아듣기 힘들어서 더 말을 아끼게 되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그동안 식비를 줄이기 위해 식당을 가더라도 단품 요리만 먹었는데 오랜만에 전채요리를 보니 먹음직스럽긴 했다. 하지만 뭔가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하고 심지어 얻어먹다 보니 밥 한 공기를 시키기도 눈치가 보였고, 그녀도 비슷한 감정이었는지 대부분의 생선살을 호스트에게 양보하고 조금만 먹고 배부르다고 했다.
다 먹고 난 후, 계산서를 받은 호스트는 그것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QR코드를 이용해 결제하면 편하다며 열심히 방법을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외국인이라 계좌 등록이 안 되는 우리는 설명을 포기하고 카드를 이용해 결제했다.
일단은 너무 피곤했고 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에 이 상황에 대한 의구심은 접어두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이어 다음날까지 그녀와 나는 따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아직 한 달은 더 머물러야 할 숙소이니 트러블 만들지 않기로 하고 자처하여 호구가 되기로 했다.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는 데에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로 집에서 요리를 해 먹고, 특히 쌀밥을 꼭 먹어야 하는 우리는 숙소에 전기밥솥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이 숙소를 예약했다. 다음 날 밥을 하려고 주방에 가니 설명대로 밥솥이 있긴 한데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급한 대로 냄비로 밥을 해 먹으면서 호스트에게 연락하여 밥솥을 수리하거나 교체해 줄 것을 요구했다.
직접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호스트가 숙소를 방문했다. 밥솥의 버튼을 누르면 취사가 되고 밥이 다 되면 보온으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버튼을 눌러도 버튼이 고정되지 않고 다시 튀어나왔다. 몇 번을 눌러보다 안되니 갑자기 포크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 채, 사이의 틈에 포크를 이리저리 끼우더니 결국 고정이 되었고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했다.
호스트의 대처에 어이가 없어진 그녀는 앞으로 한 달을 이렇게 사용할 순 없다며 수리나 교체를 요구했다. 안전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이미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였던 그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실 어젯밤에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는데, 주방을 자세히 살피니 서랍마다 식기들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이었고 건조대와 창틀 등에 먼지와 얼룩도 많이 있었다. 그대로 사용하기 찝찝해서 나는 우리가 사용할 식기들을 전부 다 꺼내어 설거지하고, 건조대와 창틀 등을 다 닦아내느라 한 시간 이상을 실랑이해야 했다..
우리 입장에선 괜히 트러블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냥 밥솥을 교체해 줬으면 끝날 일인데, 호스트가 그냥 냄비로 밥을 해 먹으면 되지 않냐며 고집을 부렸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데 말까지 안 통하니 답답함이 배가 되었다. 우리는 밥솥으로 꼭 밥을 해 먹고 싶고, 밥솥이 있다는 걸 분명히 확인하고 숙소를 예약했으므로 밥솥을 요구하는 게 정당하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해도 냄비로 하라는 답변만 이어졌고 결국 답답함에 어제의 저녁식사 이야기부터 주방의 위생 문제까지 다 불만을 표출했다.
우리의 동의를 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식당으로 가이드를 해주었기 때문에 식사는 우리가 사는 게 맞는 거고 정리정돈 되지 않은 숙소 상태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기보다는 우리의 기준대로면 호텔로 가야 한다며 우리를 예민한 게스트로 치부했다. 정당하게 에어비앤비에 접수하고 환불을 요청하겠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30분이 넘게 실랑이가 이어지면서 나는 지치고 질렸고, 사실 이제 와서 숙소를 옮기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나가달라고 하겠다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부조리를 참을 수 없다며 진정하지 못했고, 결국 눈물을 흘리며 호스트에게 소리를 질렀다.
"You ruined my life!!!"
순간 잔다르크가 현신한 줄 알았다.
결국 우리, 아니 그녀는 승리했고 호스트는 새 밥솥을 주문해 주고 돌아갔다. 저녁식사 값도 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받지 않았다. 가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녀가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결과는 참 통쾌하다.
그 흥분한 상태에서도 차마 욕은 못하겠고, 그럼에도 분노는 표출해야겠고 그러다 보니 저런 고급 표현을 떠올리게 된 것 같아 참으로 그녀가 대견하다.
사실 평생을 호구로 살아온 나는 이미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는지 가끔은 불편한 상황일 때 그녀를 떠밀기도 했던 것 같다.
You ruined my life.
앞으로의 남은 여행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