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의 결말 생각해 보기.
필자가 잘 만든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관객이 얼마나 다양한 사고를 하도록 만드느냐'이다. 이는 대중영화와 예술영화의 차이점이기도 한데,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예술영화를 보고 모호하다는 생각부터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버닝은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얼마 전 필자의 영화 모임에서 버닝을 다루었는데, 한남문학이라는 엄청난 비난부터 청춘들을 향한 돌려 까기라는 의견 등 모두가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을 바라본 이창동의 관찰일기. 내 해석이다.
이창동의 대표작 박하사탕도 떠오른다. 영호도 종수처럼 결핍을 가진 인물이고, 삶을 줄타기 하듯 살아간다. 버닝과 박하사탕 모두 그런 인물을 보여준다. 물론 버닝의 묘사 방식이 거친 편이긴 하지만.
약간 다른 이야긴데, 박하사탕과 버닝 모두 여성 캐릭터에게 가혹한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큰 하자를 가진 남성 캐릭터를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예술이라는 의견을 접했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지만, 이 해석은 이해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두고 비판하는 것과 연민을 가지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또한 연민은 옹호와 다르다. 버닝에서는 해미, 박하사탕에서는 홍자와 순임이 주인공에게 착취당하는 캐릭터인데, 그 정도가 너무 과한 나머지 이런 의견이 등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폭력, 착취 등 남성성을 드러내고, 주변 여성은 그의 피해자라는 것이 두 영화의 '표면적인 상황' 이다. 남성이 복수를 당하거나 벌을 받는 내용을 보여주지 않고, 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뿐인 두 영화를 수박 걽할듯 이해한다면 위처럼 잘못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우리에게 그들의 멍청함과 도덕적 결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캐릭터의 악함을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각해보게 하는 것. 바로 좋은 영화의 자질이자 캐릭터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다.
영화는 종수가 소설 작업(추정)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글을 쓰는 종수의 얼굴은 자기가 만든 세계관에 흠뻑 빠진 모양이었다. 처음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열린 결말인가 (필자는 열린 결말을 정말 정말 정말 싫어한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마무리를 지어야지.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의 이야기가 종수의 소설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벤은 종수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결핍이 집대성된 캐릭터다. 연애 중인 20대 남자가 가지는 가장 흔한 고민.
여자친구 혼자 타지로 떠났을 때의 불안감이 소설의 시작이다. 벤은 종수가 경계하고 목말라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캐릭터다. 서울의 고급 빌라에 살면서 포르쉐를 끌고 다니고, 화목한 가족과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을 갖고 있는 남자. 종수는 그런 그를 무척 경계하고 있다. 심지어 하는 일으 ‘노는 거' 라니.
모든 것을 가진 남자 벤의 최대 관심사는 종수다. 종수의 (사실상) 꿈인 '소설가'라는 직업을 멋있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할 정도로 흥미를 갖는다. 여기서 종수는 벤에게 불쾌한 우월함을 느낀다. 모든 면에서 열등한 종수가 할 수 있는 망상 속 자위다. 정신승리. 이 말이 맞다.
하지만 전두엽이 덜 자란 남자의 한계인가. 상상 속의 우월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싼 무의미한 두려움이 다시금 종수를 감싼다. 나를 잊었을까? 날 버리고 사라진 것인가?
벤에 대한 적대심도 그에서 기인했다. 결국 종수는 경계대상인 벤을 스토킹 하다가, 결국 배에 칼을 꽂는다. 죽음 앞에선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므로. 그렇게 종수는 벤을 꺾는다.
~라는 행복회로를 돌리는 종수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이후에 나오는 장면처럼, 사실 벤 같은 '알파메일'은 집에서 예쁜 여자와 꽁냥 대며 논다. 이것이 리얼월드다. 참으로 씁쓸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열등감에 휩싸인 종수는 심지어 해미를 혐오한다. 허무한 걸 좇고, 나보다 잘난 남자를 만나면 홀라당 넘어갈 백치. 종수도 안다. 자신의 분노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걸.
종수 집에서 놀다 돌아가는 벤과 해미에게 쏘아붙이는 장면이 그렇다. 그런 여자는 천박해. 혐오스러워. 해미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내면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건 종수의 마이다. 종수가 믿는 것이 곧 현실이다. 그런 종수에게 해미는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종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깟 자존심?
종수의 아빠는 학교에서 자존심으로 손에 꼽는 사람이다. 그 자존심 때문에 징역을 산다. 미련한 짓이지. 아들도 똑같다. 종수의 아빠는 종수의 성격을 묘사하는 장치다. 아빠의 칼까지 휘두른 종수는 그의 아빠보다 훨씬 대책 없는 막장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종수를 질책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종수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통쾌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종수는 힘든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미를 아름답게 묘사하지도, 벤을 절대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청년을 바라본 이창동의 관찰일기. 그 주인공들은 영화의 소재로 쓰일 만큼 극단적인 삶과 환경에 놓여있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상위 몇 프로를 제외한 모두가 살아감에 있어 '버티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는가. 격려도 아니고 꼰대 같은 잔소리도 아니다. 그런 그의 시선에서 위로를 받는다.
짧게 감상평을 하고 싶어졌다. 솔직히 재밌게 본 영화는 아니다. 특히 종수가 벤을 추격하는 장면에선 졸았다. 보는 내가 처음부터 긴장한 상태였던 나머지 끝에서 진이 빠졌다. '아 X발 꿈'과 비슷한 결말이 이런 생각을 부추겼다. 등장인물의 연기는 몰입을 깰 정도로 어색했고, 벤의 행동이 역한 나머지 보기 힘들었다. 시각적으론 얼마나 투박한지. 색감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너무 매력적인 영화다. 이창동이라는 장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다.
(사진 출처: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