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아파트 정문 입구 쪽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쯤 사과를 파는 트럭이 온다. 노점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더더욱이 가게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트럭 옆에 사과 박스 몇 개를 놓아두는 노부부의 장사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자리에 있었고, 노인은 늘 똑같은 멘트를 했다.
'작은 건 한 봉지에 만 원, 큰 건 만 오천 원'.
과수원에서도 판매 가치가 떨어지는 사과들을 사서, 재판매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앞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고, 한 번 사 먹어볼까 싶다가도 매번 '어차피 내일모레 또 올 텐데 그때 사자'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은 내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며칠 전, 구정을 딱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 자리에 경찰차가 서 있었다. 경찰 두 명은 트럭 옆에서 노인에게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고, 노인은 연신 고개만 끄떡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듣자 하니, 민원 신고가 들어왔단다.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치워야 하며, 또 시민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걸 설명하는 경찰들 또한 딱히 엄한 얼굴은 아니었고, “선생님, 지금 철수 안 하시면 과태료 물어야 해요.”라는 말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전했다. 그저 해야 할 말을 했던 것뿐이니까.
노부부는 천천히 사과 박스를 트럭 위로 올려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는데, 그렇다고 누구 하나 속 시원해 보이지도 않았다. 참, 민망한 공기였다.
불법은 불법이다. 도로를 점유하고 장사를 하는 건 허용되지 않은 일일 테다. 세금을 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형평성의 문제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신고한 사람도 그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겠지.
자기 빼고 모두가 법을 모르는 천치라서, 그간 신고하지 않은 건 아닐 테니까.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도 마음은 왠지 그것을 쉬이 따라가기가 어렵다. 이해와 납득 사이, 그 묘한 틈으로 씁쓸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가 떠올랐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는 그 말. 기쁨과 사랑이라면 가슴이 충만하고도 넘쳐흐를 정도로 벅찬 이름임에도, 굳이 슬픔을 주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노부부의 사과 트럭 앞에서 느꼈다. 기쁨도, 사랑도 모두 슬픔을 함께 느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란 걸. 세상에는 밀어내야 할 감정도 있지만, 그냥 받아 안아야 더 성숙해지는 감정도 있다는 걸. 노부부의 모습이 내게 준 건 분노가 아니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함께 나누고픈 슬픔 같은 것이었다.
노부부의 생계가 어떠한지 나는 모른다. 신고한 사람의 사정도 전연 모른다. 경찰의 속내도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지나가던 사람일 뿐이니. 그럼에도 그날 이후로는 아파트 정문 입구를 지날 때마다 괜히 그 자리를 한번 더 보게 된다. 사과 상자가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휑하다. 불법이 사라졌을 뿐인데, 쾌적하기는커녕 왜 이리 허전한지.
그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다만 그 씁쓸함을 외면하지 않고, 오래 지니게 되었다. 기쁨만 넘치는 하루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씁쓸함만 안겨주는 하루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그날의 사과 트럭이 내게 알려주었다.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_정호승
누가 옳고 그른지보다
세상이 정확해질수록,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가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