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의 연습

이성복, <그 여름의 끝>

by 한가온

'솔로 지옥'을 보다가 괜히 멈칫했다. 출연자 최미나수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못해, 여기저기 들쑤시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다. 좋으면 좋다고, 불안하면 불안하다고, 순간순간의 마음을 다 꺼내놓는 모습.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MC인 홍진경은 말했다.

“사람의 멘털이 붕괴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자꾸 여기저기 헤집지 말고, 자기 얘기하지 그러지 말고. 그냥 좀 가만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 줄도 알아야 해.”


뜨끔했다.

내가 딱 저 모양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만나 몇 년째 아버지처럼 모시는 부장님이 계신다. 언젠가는 내게 ‘하수’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 처음에는 ‘그래, 내가 고수는 아니니까.’ 하고 넘어갔던 말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왜 하수라 칭하셨는지 알 것도 같다.

나는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 두고 보질 못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의미를 붙이고, 결론을 내리고,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 누구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엄한 사람 붙들고 하소연에, 넋두리에-

그러니 하수로 보일 수밖에.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이제는 내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이 된 친구 하나는 며칠 전 미국으로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며칠 뒤면 새 학기가 시작된다. 업무도 바뀌었고, 교무실 환경도 바뀌었고, 관계도 미묘하게 달라질 것이다. 벌써부터 복잡한 이 마음은 불안하기도, 기대되기도, 서운하기도, 괜히 설레기도 한다.

그러면 또 누군가에게 말한다. 나 지금 이런 상태야, 하고 털어놓으면 정리가 될 줄 알고.


연애할 때도 그랬다. 누군가 내게 약간의 호감을 보이기만 해도 입이 먼저 줄줄 새곤 했다. 그러다 잘 안 되어가는 것 같으면 더 그랬다. 불안하니까 말로 확인받고 싶었고, 애매하니까 정의부터 내리고 싶었다. 무고한 나의 지인들은 상대가 왜 그러는지, 그래서 나의 감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일종의 대법관이자 배심원 역할을 수행해야 했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을 완벽하게 왜곡한 케이스다. 그런데 꼭 슬픔은 반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황만 더 복잡해지곤 했다.


흙과 물은 본래 섞여 있다.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물은 맑아진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을 못 기다리고, 휘젓고 또 휘젓는다. 그러고 나서는 왜 이렇게 탁하냐고 묻는다. 하수 맞다.


이성복의 시 ‘그 여름의 끝’에는 폭풍 한가운데 서 있던 사람이 나온다.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마침내 절망이 끝났다고 말한다. 참 부러웠다. 나는 아직 그 문장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나는 아직 폭풍의 중간, 그 어디엔가 서 있다. 절망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단정하지도 않고, 다 괜찮아졌다고 말할 만큼 단단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만 가만히 두어보려 한다. 멋있어서가 아니라, 더 탁해지는 게 싫어서.

말하고 싶어질 때는 한 번만 더 참고, 정의 내리고 싶어질 땐 한 번만 더 멈춰보는 것. 이게 고수의 태도라면, 나는 하산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한창 연습 중인 하수쯤 되겠다.


절망이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지금은 폭풍을 더 키우지는 말자는 것.

나는 아직 그 여름의 중간에 있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_이성복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고들 합니다.
그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감정은 조금씩 가라앉혀주겠지요.
그 시간의 틈을 단단하게
메우는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한가온 올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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