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by 한가온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꼭 의식적으로 어느 해, 어느 계절이 떠오른다. 어떤 계절에 대한 특정한 기억이, 그 계절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봄이 오면 ‘벚꽃 엔딩’을 꼭 찾아 듣는다. 어스름해질 무렵, 교내 방송을 틀어주던 스피커에서는 그 노래가 흘러나왔고, 벚나무에 하나둘 켜진 조명에 괜히 벅차 올라 괜히 더 길을 걸었던 그때가 떠올라서.


겨울을 그리 싫어하는데도, 눈이 오면 학교 앞 칼국숫집에서 대학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실내의 열기, 바깥의 한기. 극단의 그것들이 만나 창문엔 김이 서렸고, 우리는 한껏 유치하게 ‘아무개 하트 아무개’를 써놓고 킬킬거렸다.


노래도, 음식도 다 소박하고 평범한 것들인데 나는 왜 그것들을 계절마다의 기억으로 대표하는 걸까.

그러니까, 내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는데도 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걸까.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면, ‘나’는 결국 현실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한다.


눈 내리는 밤,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데리고 산골 어딘가로 떠나겠다고 말하는 그 장면.

그건 실제로 갈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그냥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장소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낭만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건가 보다.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사람은 다른 시간을 떠올린다.

예전에는 그 ‘다른 곳’이 완전히 낯선 이상의 세계였다면, 요즘의 나는 그걸 과거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때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그때의 내가 덜 복잡했기 때문일 거다. 지금은 생각할 게 많다. 선택도 많고, 기준도 많고, 그래서 괜히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순간도.


앞으로 가야 한다는 압박은 점점 커지는데, 그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기술도, 세상도, 모든 것이 계속 새로워지는데도 마음은 이상하게 과거로 향하는 중이다. 나도 같이 앞으로 가야 하는 압박과, 그 분명한 방향성이 주는 숨 막힘까지도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좋다고 믿어버릴 수 있었던 순간들이 그리워지는 건가 보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지금의 나는 다른 세계로 도망칠 수는 없어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속으로 자꾸 걸어 들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워지는 그때에서 숨을 고르려고. 그래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으려고 말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탸사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_백석
앞으로 가야 하는 건 아는데,
가끔은 그게 너무 뻔해서
오히려 숨 막힐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낭만이 살아있는 이유를
사유해 보았습니다
한가온 올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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