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담쟁이>
한 번은 감정의 동요가 전연 드러나지 않는 동료 선생님께 여쭤봤다. 이 힘든 일을 어떻게 버티시냐고.
“심취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땐 깔깔 웃으며 넘겼던 그 말(너무나 공감해서)이, 결국 정답이었음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주변 선생님들이 힘든 일을 겪고 있다. 같지도 않은 이유로 누군가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
지 새끼는 저 혼자에게만 지독하게 불쌍하다는 것도 모르고, 송사로써 질 낮은 시비를 거는 누군가. 그들에 의해 벌써 몇 달째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정확히는, 교권 침해의 현장이다.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공유하다 보니 원하지 않아도 감정이 튀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게 누구를 향했든, 결국은 시공간을 나누는 사람들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곤 한다.
옆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말수가 줄어들거나, 괜히 한숨이 늘어나거나, 퇴근을 했는데도 표정이 그대로인 사람들. 심지어는 하루 종일 눈물을 달고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분전환을 위해 일터를 빠져나와 술 한 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뭐랄까.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자아에게 끌려다니는 느낌.
열정일까, 심취한 걸까.
나는 열정이든, 심취든 그게 안 되는 쪽이다. 퇴근하면, 일터에서의 자아를 끊어낸다. 집까지 가져가 봐야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게 오히려 나를 더 지치게 만든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화가 나는 일이지. 그렇지만서도 자신을 위해 일터에 놓아두고 와도 될 텐데. 왜 저걸 놓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감정까지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같이 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니까.
생각해 보면 같은 일을 한다는 게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같은 하루 안에 함께 서 있다는 뜻은 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금방 털어내고, 누군가는 오래 붙잡고 있는 것뿐이지.
한때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면 될 거라 생각했다. 떳떳하니 역으로 송사를 준비하자고도 해 보았고, 위태로워 보이니 잠시 책임감은 내려놓고 자기를 돌보는 게 어떻겠느냐, 하며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다.
소용없는 일일 거다. 그러니 무언가를 해결해주려고 하기보다 그냥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감정을 대신 가져갈 수는 없고, 상황을 바꿔줄 수도 없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같이 분노해 줄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순간들도, 여럿이 서 있으면 조금은 다른 모양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인지 요즘은 담쟁이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 앞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함께 올라가던 모습. 나는 여전히 그 벽을 어떻게 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게 만드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을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_도종환
내가 뭐라고,
그들에게 힘이나 되어줄 수 있겠나요.
그럼에도
같이 버티는 사람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한가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