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후기
<마리아 스바르보바: 어제의 미래>
전시기간: 2024. 11. 22 ~ 2025. 03. 09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입장마감: 오후 6시)
전시장소: 그라운드 서울
입장권: 20,000원 (성인 기준)
오디오 가이드: 무료(H.point 어플 깔고 회원가입 후 이용 가능), 도슨트 있음
관람일: 25. 03. 06
솔직히 말해서 난 전시회 리뷰를 쓰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내 무지가 들통나는 게 끔찍하게 싫기 때문이다. 적당히 이해한 척, 잘 아는 척 하면 어쨌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줄 알 것 아닌가.
세상의 다양한 표현과 해석, 작가들의 다채로운 세계를 들여다보는 건 즐거운 일이라, 전시회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 아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요즘 뭐라도 쓰자는 마음에 전시회 리뷰 쓰기를 시도해보고 있다. 나한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번에 간 마리아 스바르보바 전시회도 리뷰를 써볼까 싶어 평소보다 사진을 많이 찍어왔다.
그런데 막상 다녀온 후엔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아리송한 부분이 많아서 '어차피 전시기간도 지났는데 굳이 내 무지를 드러내면서까지 리뷰를 써야 할까?' 싶더라. 그냥 평소처럼 입을 닫고 즐거웠던 부분만 이야기하며 다 이해한 척 하면 그만 아닌가?
그럴 예정이었는데 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막연하고 잘 모르기 때문일 거다.
예술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예술을 기꺼이 향유할 수 있겠지만 나같은 문외한의 감상은 단순하다. '예쁘다', '멋있다', '이건 대체 뭘까?' 같은 것들. 유려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해석과 감상이 아닌, 형용사나 동사, 물음표로 범벅이 된 단순한 말로 끝나는 감상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만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더 그렇다.
이런 얘기를 줄줄이 쓰는 이유는, 어차피 잘 모르는 거 그냥 잘 모른다고 툭 터놓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처럼 예술을 잘 모르지만 관심은 있는 사람들한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잘 몰라도 즐기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냥 느껴지는 만큼 느끼며 즐기면 되는 거고, 더 관심이 생기면 알아가면 된다.
어떤 감각이든 그렇다. 자주 사용하고 발달시켜야 예리하고 섬세해진다.
예를 들어 난 예전에 커피를 못 마셨다. 커피가 쓰고 시고 맛없어서였다. 그런데 오래 커피를 마시며 나름대로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려 하다보니 지금은 바리스타분들이 적어둔 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뭐 진짜 감각이 발달한 사람들처럼 세세하게까진 못 느끼지만 말이다.
내가 전시회를 즐기는 방식도 커피를 즐기는 것과 비슷한데, 즐거운 부분은 즐기고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둔다. 더 알아보고 싶으면 살짝 깔짝여본다.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까진 귀찮으니까, 딱 그 순간 내키는 만큼만 알아본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너 전시회 좋아해?'라고 물어보며 관심을 보이거나 멋지다고 말하면 적당히 둘러댄 후 입을 다문다. 그냥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것 뿐이지 잘은 모르지만, 굳이 내 무지를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앞으로 전시회 리뷰를 써서 올릴 거라면 그냥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척해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까. 잘 아는 사람이 보면 훤히 보일 걸 애써 감추려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고 싶진 않다. 그래서 그냥 툭 터놓고 얘기하기로 했다.
"뷰파인더를 보면 평행세계가 보인다. 다른 시간에 작동하는 상상의 세계이다."
"When I look into my viewfinder, I see a parallel world. It's an imaginary world that functions on a different time."
이 전시회를 예매하기까지 꽤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작품의 색감이 예뻐 관심은 가는데, 특유의 경직된 인물들과 기묘함(특히 닥터 시리즈와 정육점 시리즈에서 보이는)이 내가 무서워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보러 갔다가 거북하거나 불편할까봐 망설여졌다.
결국 전시기간의 끝자락에 겨우 보러갔다. 갔다온 소감은 '가길 잘했다!' 엄청 재밌었다. 작가의 세계에 신선한 자극도 많이 받았다.
작가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다. 공산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배경의 영향으로 작품들에는 공산주의 사회 특유의 경직된 느낌이 묻어난다. 경직되고 정돈된 요소들 속에 빨강, 파랑, 노랑 같은 쨍한 원색을 사용해서 과거의 향수를 끌어내는 동시에 현대적인 세련된 느낌을 자아낸다. 시리즈마다 나름의 스토리도 있는 것 같았다.
미리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정육점 시리즈는 여전히 기묘하긴 했지만 나름의 스토리가 있어 재밌었다. 스토리를 짚어낼 수 있는 소품들만 배열해두고 나머진 관람객의 몫으로 남겨두어 상상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둔 건지, 작가가 정해둔 명확한 스토리라인이 따로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데다 공산주의를 악으로,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표현들에 익숙해서 그런지 그런 경직되고 통제받는 사회의 모습에 향수를 느낀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갔다.
그 사회에서 나고 자랐던 사람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내가 알기로 그건 작가의 윗세대 이야기로, 작가는 윗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럼 왜 거기서 향수를 느끼는 걸까...? 의아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벗어났다곤 해도 사회 분위기가 바뀌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니, 작가가 자란 유년시절에 그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사람의 취향은 어린 시절에 접한 것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작품에서 향수와 아련함이 느껴지기는 했다.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작품에 담아낼 수 있으니까. 그냥 개인적으로 설명을 읽으면서도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렇지. 그 통제되고 주어진 소박함을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 같은 게,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작가의 지향과 잘 맞아떨어져서 그런가?
일단 그냥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작품들만 봐도 배경이나 소품의 배치 하나하나 신경쓴 게 보이고, 대칭(일종의 질서)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고 전체적으로 작품의 요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라 여러 면에서 일맥상통하긴 했다.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전시회여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이 전시장이 공간구성에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간에 엄청 신경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섹션마다 인테리어나 느낌이 달랐고(바닥재까지 달랐다) 중간중간 사진찍기 좋을 법한 곳도 있었다.(이런 걸 포토스팟이라고 하나?)
전시장이 지하 1층에서 지하 4층까지 있는데 (작가분의 작품 시리즈 <The Swimming Pool>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층을 내려가며 점차 작가의 세계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재밌었다. 아마 거기까진 의도한 게 아니고 그냥 전시장이 지하에 있었던 걸 수도 있지만서도... 그리고 다이빙대도 설치되어 있고 물소리도 나서 재밌었다.
중간중간 벽면에 거울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사진 찍기 좋게, 인테리어적으로 그렇게 배치해놓은 건지 아니면 거울에 나를 비추어보듯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내 내면을 투영해보고 각자 나름대로 해석하며 즐겨보라는 의미가 담긴건지 궁금했다.
커플 섹션도 좋았다. 다양한 형태의 커플들이 있었는데 그 표현에 공감도 가고 웃음이 났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건 노부부가 나온 작품들이었다. 색감도 좋았고 그 느낌도 좋았다.
신화를 재해석해 만든 작품 시리즈도 흥미로웠다. 수영장 천장(?)을 들어올리는 아틀란테나 헬레네와 파리스, 지옥 계단을 내려가는 에우리디케, 메두사같은 작품들이 기억난다. 신화를 어떻게 재해석했고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궁금했는데 별 다른 설명이 있지는 않아 아쉬웠다.
데칼코마니 작품들도 재밌었다. 내가 알기로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찍을 때 조명(빛)이나 각도, 조리개값 같은 카메라의 수동적인 기능을 원하는 대로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느낌을 표현해낸다.
데칼코마니 작품들은 이에 더해 편집 과정에서 사람을 복사하고 뒤집고 대칭을 만들어 어떤 무늬를 이루게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걸 표현하고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들어 흥미로웠다.
표현의 방식은 무수히 다양하며, 앞으로 더 다양해지리라. 시대가 미래를 향해 갈수록 더 그렇다.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예술'인가보다.
또, 원래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경로로 살아가다 원하던 예술의 세계에 뛰어든 작가의 환희가 느껴져서 위안도 받고 덩달아 고양되기도 했다. 중간중간 벽에 적힌 문장들이 마음을 울렸다.
끝무렵에 여기 전시되지 않은 작품 시리즈가 흘러나오는 영상도 있었다. 난 그 중에서 <플라스틱 피플> 시리즈가 가장 흥미로웠다.
그 밖에는.... 공들인 전시공간에 비해 티켓이 밋밋해서 아쉬웠다. 그냥 전시회 포스터에 있던 작품 하나만 박아넣어도 있어보였을 텐데. 티켓에 이미지 넣고 컬러로 인쇄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엄청 재밌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도 좀 더 알고 싶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