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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by 가온나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2022

-2시간 20분

스포일러 주의! 영화 내용이 가득 담긴 글이므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아따, 제목 한 번 참 길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내가 느낀 첫 인상은 이랬다. 영화 제목 기억하는데 한참 걸렸다. 보통 이렇게 길면 한국판으로 번안을 할 법도 한데 긴 제목 그대로 가져와 개봉을 해서 개인적으로 살짝 의아했다.


그런데 이 긴 제목에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영화가 그 안에서 1부 2부 3부로 나뉘는데 1부가 에브리씽, 2부가 에브리웨어, 3부가 올 앤 원스였던 거였다.


영화는 둥근 거울에 비친 행복한 세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세 가족을 비추던 거울은 이내 텅 비어버리고 이제는 영수증더미에 둘러싸인 정신없고 힘겨운 에블린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에블린에게는 엄마, 아내, 딸 등의 여러 역할이 요구되고 있고 쳐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정신없고 버거운 날들, 곧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나날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지쳐서 이혼신청서를 들고 있고 더구나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빨래방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정말 숨가쁘게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세무조사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거침없이, 더 나아가 불공정하게 에블린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원하는 말을 제대로 전하기가 어렵고, 또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가 어렵다.



세무조사원이 영수증에 거칠게 그린 진한 선의 동그라미는 마치 검은 베이글처럼, 블랙홀처럼 사람을 절망으로 빨아들인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남편),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찾아온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어떤 악이 있고,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그 악이 모든 차원, 그러니까 온 우주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에블린뿐이란다.


웨이먼드가 있는 알파버스는 다른 차원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버스 점핑'이라는 기술을 발견해낸 우주다. 그 기술은 알파버스의 에블린이 개발한 거였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행동, 개연성 없는 행동을 하면 차원을 넘어서 다른 세계의 자신의 능력을 가져다 쓸 수 있다. 알파버스의 웨이먼드와 동료들은 악, 그러니까 조부 투파키를 막기 위해 차원을 건너온 것이다.



영화에서는 검은 베이글과 장난감 눈알이 대조적으로 나온다.


조부 투파키는 어느 날 베이글 위에 모든 걸 올렸더니 검은 베이글이 탄생했다고 말한다.(실제로 에브리씽 베이글이라고, 모든 토핑이 올라간 베이글이 있다고도 한다.)


검은 베이글은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며 소멸시킨다. 검은 베이글은 가족을 비추던 둥근 거울에도, 영수증 종이에도, 돌아가는 세탁기 속에도, 눈 속에도 나타난다.


그 검은 원은 쳇바퀴처럼 모든 게 갇혀버린 갑갑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블랙홀이나 숫자 0, 공(空), 비어있는 것, 무(無),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장난감 눈알은 그와 대조적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웨이먼드는 이곳저곳에 장난감 눈알을 붙이고 다닌다. 하얀 테두리에 동그란 까만 원이 굴러다니는 하찮은 모양새의 장난감 눈알은 우스꽝스러운 것, 소소함,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것, 장난, 다정함을 연상시킨다.


살아가는데 있어 유머는 꼭 필요하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장난감 눈알은 일종의 유머를 나타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장난감 눈 붙여놓지 말랬지!!"


유머는 커녕 정신이 하나도 없는 빡빡한 삶.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정작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다음에'라며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삶. 사실 그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한 분투였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중한 것은 기약 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다.


빨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의 유리에 비친 딸 조이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느낌, 앞으로도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만 같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1부는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돌이 되는 엔딩으로 끝난다. 돌이 된다는 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명력이 없고 무감각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세상 모든 게 부질없고 허망하기만 하다.


모든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조부 투파키는 이 세계의 에블린을 찾아오는데, 사실 조부 투파키는 죽이려고 에블린을 찾았다기보다 엄마이자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정신이 갈가리 찢어질 정도로 중압감을 준 사람이지만 어쨌건 엄마고 자신과 비슷하면서 자신보다 한발짝 앞서나가는 사람(연장자)이니까.


나도 더는 살아가야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랬다.


내가 이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꾸만 되묻게 될 때, 내가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 결국엔 모든 게 허탈하고 부질없이 느껴졌을 때 다른 사람들의 답은 어떨지 들어보고 싶어서 여러 책을 찾아 읽어보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며 답을 구했다. 결국 납득이 가는 답은 얻지 못했지만. 그래서 조부 투파키의 모습에서 그 때의 내 모습이 비쳐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모든 게 무의미하고 허망한 그 무엇이 되고 마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마치 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감각하고 돌처럼 한없이 무거워져 움직일 수 없는, 아래로 아래로 하염없이 가라앉는 듯한. 그런 느낌.


2부에서 에블린은 회의적이다. 모든 것이 부질없고 아무 의미가 없으며 허망하다. 이런 에블린의 행동은 자기파괴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자신의 삶의 터전인 빨래방을 때려부수고 동료의 비밀을 폭로하는 등, 모든 세계의 에블린의 행동은 파멸적인 성향을 띤다.


그 때,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신을 투사로 여기잖아.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쿠키도 쿵푸가 될 수 있다! 다정함(쿠키=다정함)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가 실없고 생각이 없다고 여겨왔다. 에블린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지만 웨이먼드는 웨이먼드의 방식으로 싸우고(살아가고) 있었다. 웨이먼드의 무기는 다정함이었다.


그런 웨이먼드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게 곳곳에 붙여놓는 장난감 눈알이다. 웨이먼드는 소소한 순간들을 사랑하고, 장난을 좋아하고 다정하다.


에블린은 자꾸 남편을 멍청한 남편, 부족한 남편 취급하며 깎아내리지만, 다중우주니 어쩌니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여기 에블린의 현실에서 실제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던 것은 에블린이고 일을 수습하거나 분위기를 유하게 만든 건 오히려 남편이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세무조사원 디어드리가 먹고 있던 쿠키에는 스마일이 그려져 있다. 작은 미소와 상냥함(서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웨이먼드가 쿠키를 챙겨와 디어드리에게 건네준 것)이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결론과 연결되는 것 같다.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웨이먼드의 말처럼 에블린은 다정함을 무기로 선택한다. 2부에서 3부로 넘어가는 지점에서는 연대, 연결, 다정함이 두드러진다.


디어드리와 에블린의 인간적인 면(쓸쓸함, 외로움, 다정함)이 맞닿는다.


스스로를 없애고 싶어하는 조부 투파키가 검은 베이글에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를 붙잡는다. 그 뒤를 남편 웨이먼드와 아버지가 단단히 붙잡는다.



그리고 돌과 돌, 에블린과 조이가 충돌한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소행성의 충돌과도 같다고 한다. 이런 충돌은 큰 변화를 일으킨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부질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닐까?


세상에 죽음 외엔 그 무엇도 정해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기에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으며 모든 게 얼마든지 찬란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보면 허망할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으로 삶을 바라봐도 마찬가지다. 생산성, 성과, 성취, 의미.... 이런 것으로 내 삶을 조망하면 허탈하고 허무하고 결국 모든 게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인연과 순간들을 소중히 하고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것. 그러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것들이 생기를 띄고 선명하게 와닿기 시작할 것이다.



불교에는 제 3의 눈이라는 것이 있다. 이 제 3의 눈은 깨달음을 얻으면 열리는 눈이라고 한다. 조부 투파키의 미간 사이에는 검은 원으로 그려진 눈이 있고, 에블린의 미간 사이에는 장난감 눈알이 붙어 있다.


같은 걸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통찰은 다른 방향을 향해 뻗어간다.


조부 투파키의 통찰은 모든 것이 부질없으며 허망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허무주의로 이어진다. 에블린의 통찰은 지금 여기 한 줌의 시간, 순간들을 향한다. 에블린은 지금 주어진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기로 한다.



이 영화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최악의 에블린, 언뜻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에블린이라는 점이다.


그 모든 우주의 에블린 중에서도 이 세계의 에블린이어야 했고, 이곳의 에블린이 온 우주와 조부 투파키를 구해냈다.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대사가 내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어쩌면 나는 보잘 것 없고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성과와 생산성, 의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


하지만 설령 내가 일구어온 삶이 보잘 것 없어보인대도, 지금까지의 수없는 절망과 슬픔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모든 거절과 실망을 겪어왔기에 마찬가지로 수없이 절망해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다정함은 때때로 누군가를 구원한다. 사소한 친절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최악이라는 건, 얼마든지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소한 선택이 엄청난 변화를 만든다.



영화에서의 버스 점핑처럼 현실에서 실제로도 우리는 소위 '말도 안 되는 행동', '엉뚱한 행동'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 확장해갈 수 있다.


립밤을 먹거나 이마에 호치키스를 박으라는 말이 아니다. 이제까지의 내 삶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행동을 해보자는 얘기다.


개연성 있는, 내 삶의 맥락과 이어지는 게 아닌 별난 행동을 삶에 주입하는 것으로 내 삶은 생각지 못한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사소하고 이상한 행동이 삶을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 초반부에 좀 보기 힘들었다. 에블린의 머릿속마냥 진짜 정신이 사나웠다. 이게 맞아? 싶은 부분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비위가 약해서 좀 힘든 부분도 있었고...(이를테면 핫도그 손가락 같은 거.... 난 좀 속이 메슥거리는데 개그 요소니까 넣은 거겠지?ㅠ) 강아지 목줄 돌리는 거 보면서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난 원래 액션 영화 보면서도 주변 부서지는 거 보고 안타까워하는 타입이어서...


아니 다중우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건 알겠는데 저거 뒷수습은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쪽 세계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잖아... 뒷감당은 어떡해.... 거기 모인 사람들은 기억 못한다쳐도 뉴스에도 나갔고 건물도 파괴됐고 CCTV에는 기록이 다 남았을 텐데!! 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뒀지만...


뒤늦게 영화에 대해 찾아보니 아시아계 가족의 어려움이나 가족애를 언급하는 글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이 영화를 에블린이라는 한 개인, 에블린이라는 인물을 대표로 하는 개인의 가능성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전에 읽은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도 떠올랐다.



영화 초반부에 액션배우가 된 세계의 자신을 보고 온 에블린이 웨이먼드에게 '당신이 없는 미래는 멋졌다'고 말하지만 글쎄?


에블린은 버스 점핑으로 차원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의 자신의 능력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그곳의 내가 자신의 삶의 선택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는 모른다.


그 세계의 에블린은 웨이먼드랑 헤어진 걸 후회할 수도 있다. 그 세계의 웨이먼드가 에블린과 떠나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 세계의 웨이먼드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다른 세계의 에블린들이 어떤 시름을 안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상태로 그 장면에 던져져 그 세계의 자신에게 능력을 빌려올 수 있을 뿐이니.



우리는 항상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의 결과를 그리며 그 선택을 한 결과가 더 좋았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의 결과가 어땠을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에 후회하기보단 이미 내린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주어지는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 기억에 남는 건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라는 존재와 만난 후 '내 딸이 이상해진 건 다 너 때문이었구나!'라고 외치던 장면이다.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와의 관계는 모녀,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부모는 자식 안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괴물의 탓을 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틀어진 건 괴물(조부 투파키) 때문이 아니라 에블린이 조이의 본질을 제대로 봐주지 않아서, 마음을 터놓고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문제의 원인으로 엉뚱하게 다른 곳을 짚는다.


알파버스의 에블린은 뛰어난 조부 투파키에게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강요했다. 그 결과로 조부 투파키의 자아는 산산이 부서진다. 그 모든 미움과 원망 속에서도 자식은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기대는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이 피어오른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듯한 이 세계의 에블린을 찾아와 답을 구한다.


아무래도 부모님과 진득한 애증의 관계를 겪고 있는 자식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인 것 같다. 그래도 마침내 에블린이 자신과 닮은 부분이 있는 조이도, 레즈비언인 조이도 받아들이고 관계를 개선해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에블린은 베키(조이의 여자친구)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개할 때, 웨이먼드와 베키를 '그런 부족함을 메워줄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런 상대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상대를 찾아헤매기보다 내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모든 게 엉망이라고 느껴질 때에도, 내가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도, 그런 내 부족함을 메워줄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사랑스러운 점들은 언제나 있어요.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야기는 360도를 돌아 다시 원래 발을 딛고 있던 세계로 돌아간다. 영화 내내 나타나는 원 모양처럼 이야기도 원을 그리는 듯하다.


하지만 에블린은, 이야기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 360도를 돌며 겪어온 풍경들이 이미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에블린의 시야는 달라져 있다.


이 이야기를 함께한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는 없을 거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영화를 본 나와 보지 않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사소한 선택이 엄청난 변화를 만든다. 영화를 보기로 한 그 작은 선택이 내 가능성과 시야를 더 열어주었다.


앞으로의 선택들은 또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까?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고 내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https://youtu.be/SgyAIy0iF40?si=sbQCfK6N0veWPwLy


https://youtu.be/-tiKMuu6EXQ?si=9YIYhA-9xn9A4WAA




영상들이랑 책도 같이 보면 재밌을 것 같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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