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이언희/2024
-118분
※스포일러 주의! 영화 내용이 가득 담긴 글이므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정장 차림에 머리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장흥수가 옥상으로 올라가 드레스 차림의 신부 재희를 부른다. 구재희도 흥수를 '자기야!'라고 부르며 호응한다. 당연히 이 둘은 막 결혼하려는 신랑 신부처럼 보인다.
이제 장면은 20살,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간다. 제목이 대도시의 '사랑법'이기도 하니 지금부터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된 과거로 돌아가 그들의 연애 과정을 보여줄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계속 은근슬쩍 암시를 준다. 까뮈의 <이방인>, 앨비노(돌연변이)....
이렇게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소수자성을 지닌 재희와 흥수의 이야기다.
재희와 흥수는 둘 다 일반적인 관점에선 이방인 같은 존재다. 이질적이고 겉돌고 괴리되어 있다.
영화는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고정적인 편견을 건드리며 계속 인식을 뒤집는다.
사람들은 쉽사리 '당연히 ~~겠지'하고 판단한다. 특히 요즘처럼 소화해야 할 정보가 많은 시대, 속도가 빠른 시대에는 섣불리 재단하거나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면도기로 면도하는 장면은 당연히 남자, 흥수일 것 같고 비비크림을 바르는 장면은 당연히 여자인 재희일 것 같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종아리 제모하는 재희와 비비크림을 바르는 흥수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뒤집혀 있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장면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전복시킨다.
생각해보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장흥수는 닮은 데가 있다. 어딘가 절제되어 있는 느낌이 그렇다. 뫼르소처럼 흥수도 가족이 어머니 하나뿐이고, 어머니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클럽에서 놀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습이 자유롭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흥수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감당 가능한 선에서, 상처받지 않을 선에서 즐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관여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침범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늘 상처받을까봐 털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척 하고 있다.
흥수가 재희에게 비밀을 들켰을 때 안 아프게 죽는 방법에 대해서 검색하거나 미국이나 프랑스로 가고 싶어했던 걸 생각해보면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도 말이다.
사실 재희도 흥수도 아프고 흔들리고 상처받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흥수는 자신의 정체성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자꾸 상대를 떠나보내려 한다. 흥수는 재희에게 올리비에와의 관계를 들키자마자 올리비에에게 '아듀' 라고 문자를 보낸다. 영화에서 나오는 올리비에의 설명을 빌리자면 아듀는 이번 생에서는 다시는 보지 말자는 뜻이라고 한다.
올리비에가 자신도 까뮈의 <이방인>을 좋아한다고 말한 건 그냥 플러팅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둘의 동질감이나 둘이 닮은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올리비에도 '이방인'이다. 올리비에는 외국인이기도 하고 동성애자이기도 하기에 더 배척받기 쉬운 위치에 있다.
흥수와 관계를 정리하고, 남학생들이 숙덕거리는 장면 이후로 올리비에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동성애자에게 배타적인 한국 사회의 특성상 어쩌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져 잘린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자,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엄마에게 매일매일 부정당한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엄마는 매일 새벽 흥수의 방으로 들어와 아들이 낫기를 기도한다. '낫기를 바란다'는 건 아들이 비정상적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엄마는 어쩌면 그게 아들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흥수는 매일매일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하고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상처가 살을 에듯 쓰라리고 숨 막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자신을 키워온 엄마가 어떤 심정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치밀어오르는 말들을 삼키며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흥수가 엄마를 지키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사랑하니까. 스스로 손목을 그을 정도로 상처입고 정신적으로 몰렸으면서도 엄마가 더는 상처입지 않길 바란다.
내가 나임을 드러낼 수 없는 삶.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일상이 이어진다. 내가 나로 있는 게 소중한 사람을 상처입힐 수 있기에.
재희를 동거하는 여자친구로 오해한 흥수의 어머니가 "엄마는 네 병이 나을 줄 알았어"라며 기뻐한다. '내가 나인 게, 내 정체성의 일부가 병인 건가?' 흥수는 또 다시 떠오르는 말들을 삼킨다.
그런 흥수에게 재희는 휴식처이며 자유고, 숨쉴 곳이자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을 텐데. 불시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재희의 애인인 지석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둘의 동거를 들킨 것이다.
그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너무나 쉽사리 재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약점(가장 아픈 부분)이 다시 한 번, 깊숙이 흥수를 상처 입힌다. 오래 가까이 붙어 있었고 곁을 내준 사람에게 생각지 못하게 받은 상처였다.
'그래, 뭐 너도 그렇지...', '어쩔 수 없지' 라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 해도 그 상처는 폐부 깊이 박힌다. 지석에게 맞고 한참 뒤, 지석과 재희가 나가고 상황이 종결된 다음에 코피가 주륵 흐르는 장면에서 흥수가 입은 내상이 느껴져 가슴 아팠다.
재희는 섣불리 말을 뱉긴 했지만 그 말(게이라는 것)이 흥수에게 어떤 무게인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 알고 있었을 테다.
카페에서 지석의 입을 통해 그토록 가볍고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게이'라는 말을 들으며 재희는 지석과의 관계를 빠르게 정리한다. 아마 이때 지석의 언행을 통해 자기가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이 어떤 거였는지 느껴서 먼저 흥수에게 연락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한편, 흥수는 엄마에게 솔직하게 커밍아웃을 한다. '나는 게이'라고.
그 뒤엔 나도 흥수와 함께 가슴을 졸여야 했다.
영화에선 복분자주 해프닝 정도로 지나갔지만 실제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또 다른 극단적인 상황으로는 진짜 어디 끌려가서 퇴마의식까지 당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흥수의 엄마가 어느 정도는 열려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흥수 성격상 치명상을 입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매일 새벽 아들의 방에 와 기도하던 엄마가 아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게 뭉클했다. 확고하게 자리잡힌 관념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더 그랬다.
취업 준비를 하고 취직을 하면서, 그리고 지석과 사귀면서 재희는 원래의 자신을 누르고 사회에, 지석에게 자신을 맞추며 살아왔다. 사람들이 다들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세상에 나를 맞춰야 하는 법이라고 하니까. 그게 당연하다고들 하니까.
20대 초반과 중반에는 다채롭던 재희의 옷차림이 취직한 후에는 단색이나 무채색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달라진 재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게 전철에서의 장면이다. 전철 좌석에 앉아있는 재희의 맞은편에 재희와 같은 차림의 여성이 앉아있다.
이윽고 여성이 떠난 유리창에 재희의 모습이 비친다. 재희는 그 여성과 다르지 않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개성이 죽어버린 모습이다.
전복하는 것, 참지 않고 할 말은 다 하는 것.(그렇다고 그게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재희도 흥수도 굉장히 섬세한 면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재희라는 인물의 원래 모습이었다.
재희의 그런 점들은 20대 초중반에는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고립되는 부분들로 작용했지만, 회사에서의 모습이나 결혼식장에서의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은 오히려 그런 면들이 다른 사람들과 재희를 엮어주고 동료들과 끈끈한 유대를 이루게 한다.
재희는 하얀 드레스에 빨간 캔버스화를 신고 남편의 손을 잡은 채 결혼식장에 입장한다. 이는 재희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자신의 그런 면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사생활에서 그랬듯 자신을 죽이고 맞춰주어야 했던 조건 좋은 지석이 아닌,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정말 나다운 부분까지 다 포용해주고 그런 점들을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는 민준과 만나 결혼한다는 점도 좋았다.
영화에서 재희의 부모님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대신 20대 청춘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한 흥수가 재희를 보내준다.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해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의 손을 건네주는 고루한 장면이 나오는 대신, 흥수가 재희와 함께 춤을 추며 신부인 재희의 결혼을 축하해준다.
이때 흘러나오는 노래 <배드걸 굿걸>의 가사는 재희의 정체성을 나타내면서도, 재희와 흥수의 말을 대신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재희를 보내고, 재희의 책상에 앉아 흥수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뒤이어 영화 제목과 배우분들 이름이 나오고 영화가 끝난 것처럼 보이더니, 장면은 다시 재희의 책상에 앉은 흥수를 보여준다.
흥수가 재희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이 이야기가 '결혼으로 해피엔딩~', '이렇게 20대 청춘을 함께한 친구를 보냈다~' 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둘의 관계와 두 사람의 나날이 앞으로도 이어질 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시, 특히 대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그저 하나의 동떨어진 점처럼 보인다. 각 개인은 점과 점처럼 개성이 제거된 채 이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의 숲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도시에는 인구가 그토록 밀집되어 있는데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인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겉핥기 식으로만 파악할 뿐이고(이 사람은 이런 타입이지! 이런 타입이야 뻔하지~ 같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은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토록 사람이 많은데도 모두가 외로운 곳. 그게 도시다.
그런 도시에서, '이방인'에 가까운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피난처가 되고 기댈 곳이 되고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돌이켜보면 20대 때 참 많이 헤매고 혼란스러웠다. 그때의 헤맴과 상처가 나를 더 단단하게 해준 것 같다.
파란만장한 20대를 보낸 재희와 흥수는 이제 30대가 되었고 그들이 거쳐온 시간이 그들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더 단단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이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궁금해진다.
흥수는 결국 수호랑은 잘 되지 못했지만 이제는 보호필름을 벗기고, 맨몸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앞으로는 더 깊이 있고 진심을 다하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내용과 연출도 좋았지만 특히 영화의 대사들이 좋았다. 아무래도 구재희의 성격상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래서 영화의 대사들이 공감도 많이 가고 마음을 울렸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
다들 어떻게 그렇게 쉬워? 다들 왜 그렇게 쉽게 단정하는데? 정작 나는 날! 나도...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들 그래!
남들 보기에는 우리가 이상하게 보인다는 거 알아요. 아는데. 우린 하나도 안 이상해요.
보호필름 떼고 하는 거야 사랑은.
배우분들의 연기도 좋았다. 그리고 영화에서 피부라던가 얼굴이 꾸밈없이 나와서 정말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다.
아무래도 보통은 피부가 매끈하고 잡티 없이 나와서 영화에서 연예인이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게 되는데 말이다.(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원작 <대도시의 사랑법>은 오래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던 도서여서 제목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몰랐다.
이번에 본 영화가 진짜 너무 좋아서 원작도 읽어보고 싶다. 책은 단편집이고, 책에 실린 작품 중에서 <재희>라는 작품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도 있던데 드라마는 영화와 어떤 느낌으로 다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