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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Nov 09. 2019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과 영화로의 각색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화로의 각색 과정에서 숨겨진 독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Ⅰ. 서론

 매체의 연구는 그 사회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생각을 말한다. 「영자의 전성시대」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되면서 군사정권의 검열을 받게 된다. 박정희의 강력한 국가 주도 산업화는 수출지향 산업화 전략과 친자본적, 반노동적 노동정책을 동반한 경제발전에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민족주의, 가족주의, 가부장주의를 이용하는 이데올로기 정책을 기본 축으로 성립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가들은 영화, TV, 대중음악, 라디오, 신문과 잡지로 이루어진 ‘문화 산업’에 대해 연구했다. 문화산업에서 여가는 노동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준비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되면서 문화산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들을 통해 당시 독재 정권이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국민들에게 주입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영화 속에 삽입된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우리의 실제 행동양식들을 바꾸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Ⅱ. 각색 과정 속 소설과 영화의 차이

 

    1)    창수와 영자의 인물 형상화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인물이다. 인물은 말과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며, 사건을 이어가는 주체가 된다. 따라서 인물 형상화를 살펴보면, 집필자의 생각과 그가 의도한 주제를 알 수 있다. 1975년 발표된 영화는 조선작의 원작을 김승옥이 각색한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창수와 영자를 그려내는 방식이 굉장히 다르다. 


내 꿈이란 무교동의 한 화려한 술집에서 보타이를 매고 일하는 것이라든지 명동의 한 소문난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해 보는 것 따위의 그럴듯한 것이었다. (108-109)
영자가 혼자서 낮잠을 자고 있기만 한다면 나는 용코없이 그년을 올라타겠다. 애를 배게 된 다면 저도 별수 없이 내 여편네가 되어주겠지.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시시껄렁하게 군대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110)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것은 욕망뿐이어서 걸핏하면 다리 사이에서 그놈이 천막을 치고 일어서는 바람에, 사실 나는 그놈을 적당히 달래 주는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쁠 지경이었다. 그쯤 되면 창숙이 년이고 나발이고 간에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허겁지겁 꺼야 했던 것이다. (110)
씨발년들, 저들도 별수 없이 앉아서 오줌이나 갈기는 주제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게 무어야 하고 생각하며 나는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112)


소설의 창수는 그럴 듯 해 보이는 일자리를 꿈꾸며, 돈이 생기자 성적 욕망을 달래기 위해 창년촌을 어슬렁거린다. 또한, 지나가는 여성들에 대해 상스러운 욕을 서슴지 않는 그의 모습을 통해 성실함이나 젠틀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양복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이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러한 꿈을 가지게 된 동기도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뚜렷한 생각이나 계획을 갖지 못한 다소 방탕하고 무계획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영화의 창수는 자신의 양복점을 갖는다는 명확한 꿈을 이루기 위해 라면만 먹으며 성실하게 일하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또한, 주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는 평상시에도 성실한 태도와 인품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소설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인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정반대의 인물 형상화는 영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왜 그랬어. 어쩌다가 팔뚝을 그랬느냐 말이야.” “ 시시한 이야기는 진짜로 집어치우라니까 그러네, 신경질 나게.”  (118)
영자도 허리가 부러져 나가도록 깔깔거리며 웃었다. (123)
“돈을 모아야지. 이젠 무조건 돈이나 모으는 거야.” 영자는 이를 갈아 마시듯 다부진 말투로 입버릇처럼 자주 이렇게 말했다. (125)
영자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이렇게 서두를 끄집어냈다. 사내들이란 어린애나 늙은이나 모두 주책이라고 말했다. (126)
그 뒤로 영자는 정말 악바리처럼 뛰었다. 그만한 정성이라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었다. (125)
영자는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모은 돈을 나이롱 아줌마에게 맡기고 있었다. (132)


 소설 속 영자는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한탄하기보다는 미래의 희망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이 번 돈으로 창수와의 살림을 꾸려나가기를 소망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태도들을 보인다. 그녀는 몸을 팔아 버는 돈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당차고 다부지게 삶을 살아가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소설 속 영자는 창수와 재회하게 되는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되려 비관적이고 우울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어넘기거나 이를 갈며 스스로를 다잡는 모습을 보인다. 소설 속에서는 창수보다 영자가 더 강인하며 능동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영자는 다르다. 그녀는 가정과 아이를 갖게 되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우울해한다. 목욕탕 아저씨가 이야기한 마이너스 일이라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동의하며, 창녀라는 자신의 직업, 비관적인 현실에 대해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영자는 자신의 돈을 도박으로 탕진하거나 우울증 약과 술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잘못된 선택을 내리며, 유아적이고 의존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창수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아이와 같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수동성, 소극성, 순응성 등의 특질로 규정되었기에 그에 합당한 여성상이 높이 평가되었다. 음지에서 남성을 자신보다 앞설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야 제구실을 하는 것이고, 성적인 욕구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말아야 여자답다는 것이다. “여자가 살림만 잘 살아준다면” “여자가 기술을 가져봤자, 팔자만 드세질 뿐이다.”라는 영화의 대사들을 통해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행동양식이나 특질들을 영화는 관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소설에서 영화로의 각색의 과정에서 왜곡된 인물들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 근대 가부장제는 지배와 종속관계가 특징인 부부관계와 모성주의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멜로 영화는 소위 국가적 위기라는 것을 퍼뜨리고 통제하기 위해 가동되었다. 이 국가적 위기란 군사정부가 자신들이 행사하는 독재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입하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일환이었다. 비극의 여주인공들은 전후의 불안, 저개발의 압박, 혹독한 가난 등과 같은 국가적 위기의 기표로 채택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 유신헌법이 강제적 검열로 영화에서 사회 문제를 현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 멜로영화는 큰 변화를 맞는다. 영화들은 그 당시 출현하던 섹스 산업, 특히 소위 룸살롱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춘다. 이로 인해 호스티스 멜로 영화가 등장하여 영화 문화를 지배하게 된다. 호스티스 멜로 영화로 분류되는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대 여성들의 문제를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섬유 관련 산업에서의 여성 노동자 착취는 당시 가장 긴급한 사회문제였음에도, 이는 영화 속에서는 다뤄질 수 없었다. 소설에서 불타 죽는 영자를 과감하게 삭제시킨 것도 영자의 최후가 전태일 열사와 겹쳐지기에 당국의 검열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영화의 영자는 자신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인식한 후 그 원인을 가난한 가족환경 혹은 자신의 잘못된 직업 선택들을 꼽는다. 그리고 힘든 순간마다 시골에 있는 가족들을 떠올린다. 현실의 비극은 가족의 가난함에서 비롯되었거나 자신의 잘못에서 찾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견뎌내자는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에서 많은 액수를 시골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야 했다.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섹스 산업에 포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멜로 영화는 그녀가 전락한 동기를 부주의하게 처녀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든가, 성적 욕망이 과도했기 대문이라는 식으로 돌렸다. 영화「영자의 전성시대」의 경우 다른 호스티스 영화들보다는 영자를 우울하고 불쌍한 여성으로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에게 동정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결국 창녀라는 자신의 직업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책하는 모습이나, “몸을 팔아 버는 돈은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영화 속의 대사들을 통해 영자라는 인물의 비극적 현실은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이 영화는 은연중에 군사주의적 암시와 상징이 숨겨져 있다. 남성들은 이러한 문화적 기호를 통해 메시지의 의미를 배우고 전달받는다. 관객들은 영화 속 창수가 우는 장면에서 영자의 “남자가 못나게 스리 왜 울어?”라는 대사를 보며 남성은 울지 말아야 할 강인한 존재로 학습받게 된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의 실제 삶과 경험이 아닌 남성들의 환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다시 여성들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을 억압하게 된다. 이어서 창수의 왜곡된 남성성이 발현되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서사에 대해 살펴보자.


    2)    창수의 트라우마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창수의 모습이 과감하게 생략된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은 창수가 보낸 편지를 읽는 영자 혹은 주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등장하는 언급들로만 축약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창수의 내면 독백은 영화에서 완전히 삭제된다.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 나는 괜스러 허둥대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것을 영자에게 심통스럽게 던져 주었다. (…) 그런데 영자는 그것을, 굶주린 사람이 허둥지둥 밥술을 떠 넣듯 그렇게 줍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나는 사람을 죽일 때와 마찬가지의 잔인스런 쾌감에 떠받치기 시작했다. 내가 난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를 돈 주고 샀어 옷을 벗어. 사그리 벗어 버리란 말야.” (119)


그때도 나는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못생긴 처녀 하나를 불필요하게 비상식량 한 상자를 주고 샀던 것이다. (…) 나는 어리석게도 영자의 그곳을 향해 달려들 통증을 상상하며 영자를 깊숙이 점령했다. (120)

   

소설의 창수는 영자와의 성관계에서 베트남전에서 겁탈하려고 했던 소녀를 떠올린다. 영자를 ‘점령’했다는 표현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이 창수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로 이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수는 영자의 몸을 돈으로 사는 자신과 전장에서 베트남 처녀에게 비상식량을 주고 관계를 맺으려 했던 과거의 자신을 겹쳐서 보게 된다.  


소녀의 그 슬픈 저항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내가 무지막지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었을까. (…) 그러나 영자의 그곳은 슬프게도 마치 헐거운 팔찌처럼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 있었다. (120)


 창수는 전장의 소녀를 겁탈하려는 과정과 영자와의 성관계에서 슬픔의 감정을 느낀다. 그리하여 자신의 폭력성을 인지하게 되고, 영자를 인간적인 감정으로 대하게 된다. 영자에게 의수를 만들어주고, 몸을 팔며 돈을 버는 영자의 기둥서방 노릇을 자처하는 등과 같은 행동들을 거쳐 그녀를 자신과 상황의 인간임을 알게 만들어준다. 

대부분의 경우 전장 중에서 일어난 성적 폭력은 처벌을 받기보다는 전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더욱이 전시하의 강간은 점령지의 접수라는 상징을 동반하고 있어서 암묵적으로 허용되거나 은밀하게 조장되었다. 이처럼 성적 폭력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들은 군대 생활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폭력을 유발하는 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베트남전의 성폭력 장면을 생략하고, 그를 성실하고 올곧은 청년으로 그려낸다. 전장의 성폭력은 전쟁의 폭력성과 깊이 연관된다. 전장에서 힘을 가진 자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정의로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희생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하는 폭력과 결코 구분될 수 없다. 전장의 논리, 달리 말해 약자/패자/죽은 자에 대한 강자/승자/살아난 자의 우월성이야말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둔화시키고, 모든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상실을 초래한다. 전쟁은 여성적인 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남성적인 문화와 사상을 확고히 한다. 폭력적 남성성을 옹호하고 남성을 민족의 수호자로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고착화시킴으로써 남성을 민족의 수호자로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고착화시킴으로써 남성=보호자, 여성=피보호자라는 이분법적인 신화를 사회적 구도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강화시킨다. 

 베트남에 용병으로 참전했던 창수도 창녀 촌의 영자도 모두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하에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시대의 피해자들이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자신도 영자와 다름없는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의 피해자라는 것을 자각시킨다. 따라서 베트남전에 대한 창수의 트라우마를 삭제시키는 것은 왜곡된 남성성과 가정, 전쟁, 국가의 폭력성을 삭제시키는 것이다.


    3)    창녀를 바라보는 방식


소설 속의 창녀촌은 자생적으로 돌아간다. 오팔팔은 그녀들의 공화국이다. 링컨의 민주주의에 대한 연설을 이용하여, 창녀들의 권익과 민주주의가 동시에 짓밟히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다. 자신들의 공화국인 오팔팔에서 성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들의 불도저 작전으로 인해 그녀들은 쥐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부터야.” 영자는 이를 갈며 대체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127)
“맞다 맞아. 창녀들의 창녀들에 의한 창녀들을 위한 오팔팔공화국 아니가.” (128)
그러나 골목의 입구는 경찰들의 방망이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어 진짜로 창녀들은 독 안에 든 쥐가 아닐 수 없었다. (133)
영자의 때를 벗겨 주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지만, (…) 나는 영자가 측은하게 생각되었고, 영자의 때를 밀어주는 일이 즐겁기까지 했다. (121)


 푸코의 규율사회에 의하면 개인들은 학교, 공장, 군대, 병원, 감옥과 같은 기관들에서 훈련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간 교육을 받고, 자라나 공장의 노동자가 된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병원에서 치료의 대상이 되거나, 감옥에서 개도의 대상이 된다. 영화의 영자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영화에서는 소설에 없던 영자의 성병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는 환자로 규정된다. 그녀는 자신의 썩어가고 있는 더러운 몸을 병원에서 치료받아 깨끗해졌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장면은 창수가 영자의 때를 벗겨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 배치는 때를 밀어주는 장면이 병원에서 영자가 깨끗해지는 정화의 역할을 수행함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영자는 창수가 나타난 후로 자신의 과거가 창피하고 부끄러워진다고 고백한다. 때를 밀어주는 행위는 소설에서 창수가 영자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으로 해석됨과 달리, 창녀라는 과거를 가진 영자는 정화되어야 할 존재이며 그녀를 구원해주는 이는 영자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창수이다. 때를 밀어주는 장면 이후, 창수와 헤어진 영자는 자신이 사는 창녀촌으로 돌아온다. 영화 속의 창녀촌은 춥고 더러운 장소로 묘사된다. 이 장면을 통해, 창수의 부재는 영자에게 따스한 보금자리와 미래의 상실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가정이라는 공간과 아내라는 지위를 약속받지 못한 다른 창녀들은 영자와 다르게 더러운 곳에서 씻고,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영자는 창수의 부재로 비참한 창녀의 삶과 안락한 아내의 삶의 간극을 인식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창수에게로 도망친다. 


당시, 군사정권은 매매춘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겠다며 1961년 말까지 강력 근절을 외쳐댔다. 그러나 달러를 벌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1973년은 외화벌이를 위해 매매춘의 국책사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여행사들을 통해 기생관광을 해외에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문교부 장관은 1973년 6월 매매춘을 여성들의 애국적 행위로 장려하는 발언을 하였다. 박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시행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성노동에 대한 대가는 당국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매매춘 여성들의 총수입은 80%를 중간착취를 당했으며 정부는 화대 착취구조를 묵인했다. 매매춘의 국책사업화는 국내에서 외국인들이 많은 돈을 쓰고 가게 하자는 기묘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 진정으로 매춘 여성들이나 빈곤여성들을 끌어안아 범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조성해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속 영자는 자신의 성노동에 대한 수입을 이야기하자, 목욕탕 아저씨는 이에 대해 매춘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열녀 이데올로기, 환향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환향녀는 왕조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 발생한 시대의 희생자였음에도 왕조와 집권 사대부는 그들에게 사죄하기는커녕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책임을 떠넘기고 자살을 강요했다. 효에서 충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시대처럼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창녀들에게 조선시대와 같은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박정권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희생당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음지에서 이바지한 사람들에 대해 적절한 사회적 보상이 돌아가게끔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데 앞섰다. 

 소설 속 오팔팔은 경찰들의 단속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그녀들의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들의 공화국을 왜곡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박정희 정권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모습과 겹쳐진다. 영화 속 창녀들은 부끄러워해야 하며, 보호받지 못함은 당연하고, 죄를 짓는 더러운 존재들로 규정되고 있다. 


   4)    영자의 최후

소설은 영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영자는 늘 가족과 함께 존재한다. 창수를 만나기 전에는 시골의 가족들과 결부되어 존재하고, 창수와의 만남 동안에는 그와의 가정을 약속받으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아이와 가정을 갖게 되자 비로소 행복하게 웃을 수 있게 된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영자의 얼굴과 오버랩되는 두 남자의 모습은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라는 위치를 부여받을 때에야 행복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소방차들의 소화작업도 길 건너편의 건물들에게 불길이 번지는 일을 막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물줄기는 불길 쪽보다도 엉뚱하게 백화점이나 호텔의 벽을 후려때리며 식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36)
세 구의 시체들은 마치 화염방사기에 타 죽은 베트콩의 그것들처럼 시꺼멓게 그슬려 있었다. (136)
“이 바보야, 누가 널 보고 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랬어, 누가.” 그러나 영자는 마치 장난기까지 섞인 말투로 “불은 내가 질렀는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37)


 소설의 영자는 불 타 죽는다. 그녀의 죽음은 전태일의 죽음과 겹쳐지며, 노동환경의 열악함과 외면받는 창녀들의 비참함을 폭로한다. 창녀들이 불타 죽는 순간 조차 소방차 즉 국가는 그녀들을 구하는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백화점이나 호텔로 상징되는 근대화의 풍요로움이다. 영화의 창수는 자신만의 양복점을 갖게 되지만, 소설의 창수는 영자도 삶의 의미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는 영자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남성으로 살아남는다. 소설에서는 어떤 인물도 행복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조국 근대화라는 목표 하에 동원된 시대의 희생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길을 보며 창수는 영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불길은 그녀가 자발적으로 내고 있는 목소리이다. 소설의 영자는 죽어가며 내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목표 하에 성장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주의와 가족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국민들의 자발적 동원을 위로부터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들은 폭압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교적 전통을 충효사상과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근대적으로 재구성한 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인 학교교육과 대중매체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내면화시킴으로써 정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도 매체를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로 작용한 것이다. 

 박정권은 충효교육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에게 국가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를 주입시켰다.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의 필요와 이익이 보통 시민들의 필요와 이익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여겨지며, 정부에 반대하거나 지도자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법적인 절차가 없다. 당시 유신정권은 이처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권위주의 정부였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현모양처이면서 동시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시킴으로써 가족의존적이고 여성 희생적인 산업화가 여성들에게 부과한 과중한 노동과 종속적 지위를 감내하도록 했다. 영화 속 영자가 의존적이고 모성적인 인물로 변화된 것은 여성들로 하여금 모범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따르도록 종용하기 위함이다.

 또한, 수출에서의 가격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의 유지를 산업화 성공의 기본 전제로 여겼다. 저임금 유지를 위해 저곡가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는 농촌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영자가 농촌의 가족들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보내는 모습은 근대화 정책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농촌의 가족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농촌의 가족들은 농업 생산만으로 가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도시로 나간 가족원들의 송금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겨우 가계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영화는 소설이 이야기하는 본질을 흐리며, 민주주의의 담론 형성을 방해한다. 불꽃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삭제시키는 각색은 이러한 측면에서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독재정권의 개입으로 인하여 침묵하고 복종하는 개인이 되도록 종용하고 있으며, 이는 곧 민주주의 쇠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Ⅲ. 결론


 소설과 영화의 차이에서 드러난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알아봤다. 영화의 인물들은 규율 사회에서 통제되는 복종적 주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소설의 영자는 불꽃으로, 창수는 베트남전의 회상들을 통해 이러한 규율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대항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소설은 영화와 다르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복속하지 않는다. 또한, 재설정된 인물들, 삭제된 베트남전의 역사, 창녀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가족에서만 존재 가능한 여성의 모습들을 통해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민족주의, 환향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독재정권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의도적으로 삽입한 이유와 역사적 배경들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를 통해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규율 사회에 지배되지 않으려는 대항하는 주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삭제된 설정들과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소설의 탁월성을 알 수 있었다. 





1.     기본자료

-      조선작, 「성벽, 징소리 外」, 동아출판사, 1995

-      김호선, 「영자의 전성시대」, 1975, 영상자료원


2.     참고문헌

-      정진성, 「한국 현대 여성사」, 한울아카데미

-      권영민, 「한국 현대소설의 이해」, 태학사

-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      유지나,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민음사

-      김미현, 「한국소설과 페미니즘」, 신구문화사

-      김종욱, 「한국 현대소설의 서사 형식과 미학」, 역락출판

-      강준만, 「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인물과 사상사

-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들」, 씨앗을 뿌리는 사람

-      앤서니 기든스, 「현대사회학」, 을유문화사

-      존 스토리,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태학사

-      김현주, 「1970년대 대중소설의 육체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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