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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Nov 09. 2019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여성적 진술 방식과 상징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최윤의 문체에 대한 분석 

        여성적 진술 방식과 상징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I.      서론


 1980년대 소설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아마도 80년 5월의 광주일 것이다. 살육의 현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주의 끔찍함은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많은 작가들은 경직된 삶을 만든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실체 규명작업을 광주항쟁의 형상화를 통해 시작했다.  당시 많은 작품들이 광주항쟁을 계기로 권력의 기반을 구축한 군사정권의 비도덕성과 폭력성 앞에 좌절되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냈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역시 마찬가지만, 이 작품의 경우 최윤의 독특한 문체로 차별화되는 지점을 보인다. 작품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광주폭동이라 규정되리만큼 왜곡되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몽환적인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리얼리티를 떨어트린다는 지적과 함께 사실적인 묘사나 사건의 형상화가 아닌 상징적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어 읽기 쉽지 않다는 점들이 작품의 한계라는 평을 받았다. 반대로 그 문체는 되려 풀어지면서 번지고, 흐르면서 흡수되는 여성적인 말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본고는 이러한 <꽃잎> 속 최윤의 문체의 특징인 여성적 진술 방식과 상징적 이미지라는 서술방식이 광주항쟁을 풀어내는 데 채택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5.18이라는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말해져야만 했는지의 고민은 그 날에서 살아남은 자들(소녀)과 남겨진 자들(장 씨)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해줄 것이다. 또한, 폭력적 현실에서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이며 최윤은 시대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조명해줄 것이다.   


 Ⅱ. 여성적 진술 방식


 강함과 힘에 대한 숭상, 사나이다움의 추구와 연약함에 대한 멸시, 애국심과 맹목주의, 반공주의와 발전주의, 승자 제일주의와 순응주의, 속도 숭배와 효율주의, 이 모든 것을 집중적이고도 일관되게 추구하고 체현하고 있는 집단은 한국의 군대 즉 군사정권이었다.  그 한복판인 88년에 「꽃잎」이 발표됐다. 그리고 그 해는 광주항쟁이 있은 지 언 10년 차에 접어듦과 동시에 88 올림픽으로 축제의 분위기가 넘실댔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학살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일에서부터 노동자와 빈민을 탄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원 없이 악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3저 호황이 가져다준 경제적 풍요와 올림픽이 선사한 영광은 사람들로 하여금 광주의 악몽을 망각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곳곳에서 새 시대와 새 출발이라는 단어들이 넘쳐났다고 지적한다.  아픔은 무뎌지고, 기억은 흐려져가고 있었다. 광주는 더 이상 우리를 묶어주는 공동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기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꽃잎」의 여성적 진술 방식이라는 서술방식의 당위성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80년대 국가주의를 지탱해주는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다.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동인이 없었다면 개인은 국가주의에 일상적으로 동원될 의지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 내부에 권위와 위계가 존재하는 일종의 질서인 가부장제에 대해 여성적 진술 방식으로의 글쓰기는 그 지배질서 안에서의 억압과 저항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전략적 서술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적 진술 방식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시작되어 군사정권을 통해 국가주의로 까지 이어지는 당시 한국사회의 지배집단의 거짓과 허위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언어가 된다. 

 또한 여성들은 소수집단으로 존재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언어를 통해 기존의 지배집단의 언어를 흔든다. 때문에 이러한 언어로의 글쓰기는 현실 속에서 혁명적인 가능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변인으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아프게 경험하는 주변인들을 대변한다. 그래서 이들의 언어는 5.18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다루기에 적절하다. 본고는 소수집단들의 존재와 경험을 표현하는 모든 문체를 여성적 진술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여성적 진술 방식을 초점으로 「꽃잎」에서 드러난 최윤의 문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성찰적 서술방식

    (1)   침묵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는 장 씨의 서사(1,5,8), 소녀의 내면 시점(2,4,7,9), 우리들의 시점(3,6,10)으로 구성된다. 장 씨가 바라본 소녀와 관련한 서사인 1,5,8장에서는 모두 침묵이 등장한다.


남자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침묵이었다. (211) – 1장 
여전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준비된 쟁반을 앞에 놓고 식사를 했다. (241) – 5장
완벽한 무반응이 고통이었다. (265)
완전한 침묵. 마치 거리가 정지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에고 길이 없는 것처럼 갇혀버린 느낌. (268) – 8장


 소녀는 장 씨와 함께 있는 동안 침묵을 지킨다. 장 씨는 소녀의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하는데, 침묵은 소녀의 반항이자, 처절한 상황에 대한 유일한 반응 양식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5.18의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미쳐버린다. 그런 그녀가 마음의 평온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언어는 말이 아닌 울음이나 웃음뿐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 한바탕 울 수나 있었으면, 내 몸의 물기가 다 빠져나갔어. (230)
어느샌가 뱃속 저 깊은 곳에서 공허한 공기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나는 그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입을 벌렸지. 사람들은 내가 웃는다고 다시 때리고 윽박질렀어. 나는 죽을힘을 다해 입을 다물었지. (255)


 결국 그녀가 택하는 것은 침묵이다. 침묵은 그날의 충격으로 슬픔과 분노를 밖으로 발설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또, 말을 중간에 가로채거나 끊어버려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남성들의 언어라면, 침묵의 언어는 싸움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여성적 진술 방식이 된다. 이는 장 씨의 내부적 폭력 혹은 5.18이라는 외부적 폭력에서 소녀의 언어를 빼앗아 가는 상황을 침묵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장 씨 혹은 신군부로 상징되는 남성적 언어는 왜곡되거나 부패해 있기 때문에 소녀의 순수성을 위협한다. 이런 훼손된 언어의 사용은 현실에 타협하게 하거나 되려 소녀의 자아를 위협할 수 있다. 때문에 소녀의 침묵은 진실을 표현하고, 타협된 세계를 거절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2)   내적 독백

 소녀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내적 독백 서술방식은 5.18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적합한 여성적 진술 방식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 판별할 수 없는 혼란 같은 것들이다. 


나는 혼자야, 혼자. 내 눈과 목을 단번에 덮어버린 휘장을 벗겨내지 못해서 나는 혼자가 되었어. (232)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살아났어. 늘 그렇듯이. 저주스럽게도. (260)
나 혼자 살아남으려고 나는 엄마의 손, 팔, 흰 눈자위를 내 발로 짓이겼어. 엄마가 눈자위도 없이 나를 보고 있었어. (283)


 내적 독백은 합리적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에 혼미한 의식을 다루기에, 이성의 검열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내적 독백은 자기 성찰적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내적 독백은 살아남은 자들이 처한 딜레마와 그것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소녀는 소설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는 얼굴의 환영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소설에서는 이를 잊어버리기 위한 상징적 이미지로 검은 장막이 등장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무덤에 꽃을 내려놓으며 추모하는 모습(268)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녀가 그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마침내 그녀는 그날의 희생자들의 얼굴과 자신의 변해버린 얼굴을 가리는 검은 장막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는다.


언제부터 그 휘장이 네 머리를 덮었다는 거야. 거짓말, 나를 똑바로 쳐다봐. (259)
이제는 무섭지 않아. 검은 휘장을 뜯어내고 내 흉악한 얼굴을 무덤 위에 떠올리는 거야. (283) – 9장


생존자들의 딜레마는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 설명된다. 살아남았지만 기뻐할 수 없고, 살아남은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소녀의 독백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남겨 놓은 상처와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상처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치유되지 않는다. 시간을 거슬러 상처와 끊임없이 대면하려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따라서 소녀의 독백은 치유로 이어지기 위한 상처와의 대면이자 성찰의 과정이다. 동시에 소녀로 상징되는 살아남은 자들의 성찰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소녀는 자신의 생존의 이유를 외부의 세계에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녀의 독백은 실존적인 진지함이나 호소력을 지니기에 독자들에게 공감의 폭을 넓혀주는 효과를 지닌다.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며 5.18이라는 비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된다.  


    (3)   광인

 광기는 폭력적 세계에 대항하는 소녀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소녀는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로 인해 미쳐버린다. 이는 소녀를 둘러싼 세계가 미쳐버렸기에 이에 대항하는 충격 요법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아무도 미친 사람의 말을 막지 못한다. 광기의 언어는 자유롭게 말하는 방식이 보장되기에 진실을 밝히려는 수단으로 선택될 수 있다. 광인의 무질서한 발화는 남성의 이성적이고 규범적인 세계를 교란하는 언어 전략이다. 이성은 질서나 물리적 제약, 압력이나 일치에 대한 요구를 의미한다면, 광기는 이러한 이성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남성적 권위나 권력에 대항하거나 거대한 감금에 저항할 수 있는 고유의 힘을 가진 것이 광기로 표현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수단이 없어서 억눌린 분노와 고통을 광기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  광인은 15세기 말 서양의 문학이나 미술 등에서 집중적으로 형상화된 주제였다. 사람들은 광인이나 바보에 대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혼란스러운 힘을 인정했다.  보쉬의 그림 <바보들의 배>를 보면 중세 말 쫓아내고 싶은 광인들을 태워서 여러 곳을 항해시켰던 역사를 알 수 있다. 광인들은 갇히지 않고 마을 사람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돈키호테가 끊임없이 비웃음을 사면서도 세상을 떠돌며 기사도 순례를 했던 것과 같이 실제로도 그들은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광언은 자유로움과 본능, 솔직함을 드러내는 여성적 진술 방식이다. 남성의 권위로 상징되는 이성에 대항하는 힘을 지녔기에 미쳐버린 그녀의 웃음과 행동들은 장 씨를 불편하게 만든다.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그녀였다.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다. (265)
그러나 그녀의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통해, 모든 의미가 비어버린 실성한 웃음을 통해, 흔적 없이 지워져 버린 인격의 모든 부재를 통해서 남자는 점점 더 자세히, 점점 더 강한 증폭과 깊이로 그녀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소문의 도시 전체를 보았다. (262)


광인들은 자신들의 질서로 살아가기에, 기존의 상식을 흔들고 파괴한다. 그래서 광언은 기존의 질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면 남자는 그녀가 비록 멍하게 웃는 일이 잦다고 해도 그녀의 머릿속이 부분적으로 고장이 났으리라는 평소의 생각은 부질없이 느껴지곤 했다. 그녀는 분명 그로서는 알 수도 없고,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어떤 다른 나라에서 그쪽 세상의 질서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241-242)
남자는 지금까지 도시의 음지를 배회하는 수많은 미친 사람을 보았다. 대부분 그냥 지나쳐버리거나 웃음거리로 돌렸던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처음으로 남자에게 괴상한 의문부호로 다가왔다. (242)  


2.   치유적 서술방식


 여성적 진술 방식은 성찰에서 머무르지 않고 치유의 단계까지 나아가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삶과 시대의 부정성을 인식한 등장인물들과 독자에게 문제를 해결하고, 새롭게 나아가도록 이끈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5.18이라는 사건과 결부되어 모두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인물들이 회상, 시점 교체, 여정이라는 작품 속 과정들을 통하여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고는 인물들이 마음의 상처에 갇히지 않고 나아가는 그 과정들을 치유적 서술방식이라고 정의한다.  


(1) 회상

 회상은 과거에 대한 재구성과 재해석을 통해 극복하지 못한 과거의 모순을 현재 속에서 끝없이 환기하려는 행위다. 회상을 통해 서로 다른 상황에서 경험된 그날의 분산되었던 기억들이 서로 합쳐지게 된다. 그리하여 온전하고 분명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회상을 통하여 인물들은 과거에서 해방되고 5.18에 대해서 바로 마주설 수 있게 된다. 억압되어 있던 과거는 회상을 통해 보존되면서 현재의 상황이 발생하도록 하는 근원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여정을 회상하고, 장 씨와 김 씨는 소녀를 회상하고, 소녀는 그날의 기억들을 회상한다. 그 근원을 방문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회상으로 현재화된 과거는 인물들이 처한 현 위치를 발견하게 해 준다. 


나는…… 그래. 자 천천히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을 되새겨봐. (281)


 과거에 대한 인물들의 회상 행위는 독자들에게 현재의 부정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가 망가져버린 현재를 맞이하게 된 것은 회상해보니 모두 그날 때문이었다. <꽃잎>도 마찬가지다. 회상이라는 작업을 통해 현재의 부정성을 확인하고, 현재의 부정성을 야기한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회상의 과정들은 통해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이다.  


남자는 이날 밤, 바로 이 영원히 각인된 상처 조각과 그 상처 조각이 숨 쉬고 있는 수치스러운 흔적들과 정사했다. (215)
그리고 맨바닥에 손등으로 회중전등의 빛을 막고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그녀와 동일한 인간인 것이 수치스러웠고 무서웠다고 했다. (249)
창피스러운 나의 호흡을 정지시키고 (…) 수치스러운 기억처럼 질길 대로 질겨진 채 뼈에 달라붙어 있는 나의 살가죽(255)
그 유혹보다 더 큰 힘, 수치의 힘이 내 몸을 온통 경련하게 했어. (259)

 

 1장에서 장 씨가 소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할 때, 6장에서 김 씨가 소녀를 처음 발견한 순간을 회상할 때, 7장에서 소녀가 그날의 기억에 대해 정의 내릴 때, 모두 수치스러운 감정이 동반된다. 장 씨는 8장과 10장에서 과거 소녀에게 폭력을 저질렀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여자애의 상처들이 남자의 몸에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대는 것 같았다. 꼭 그녀의 상처가 눈에 거슬려가 아니라 남자는 그녀를 대하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262)


 소녀에 대한 장 씨의 태도 변화는 광주항쟁을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우리들의 태도 보여주는 것이다. 장 씨는 처음에 소녀를 보면 불편해하고, 자신도 모르게 ‘가해의 리듬’을 이전받으며, 소녀를 폭행한다. 이는 5.18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불편해하고,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의 위치에 놓여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여기서 폭력은 망각과 동의어다.


점점 잦아지는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를 멈추지도 못하고 즐거이, 조건 없는 망각의 행복 속에 갇혀버릴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270)


 망각은 또 하나의 학살의 시작이다. 장 씨는 소녀에 대한 기억을, 소녀는 그날의 기억을 망각하고자 했다. 하지만, 최윤은 그것이 또 다른 폭력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광주항쟁이 있은 지 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그 기억을 잊고 싶어 했다. 최윤은 우리들의 모습을 상기시켜주고자 장 씨라는 인물을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장 씨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우리들’을 만나 10장에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수치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방관자, 가해자가 아닌 소녀를 돕는 조력자로 부상한다. 장 씨의 얼굴이 소녀의 친오빠와 겹쳐진다는 서술은 이를 증명한다. 


남자의 이야기는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 거의 오열에 섞인 독백에 가까운 남자의 이야기를 무한히 깊은 심연을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들었다. 남자는 매 구절마다 자책하고 있었다. (289) 
남자의 옆얼굴과 큰 체격의 어딘가에는 이미 일 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친구의 모습이 서려있었다. (289)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나간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회상이라는 서술방식은 5.18이라는 과거를 붙잡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역사의 표현법이다. 

 최윤은 독자들로 하여금 회상이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라면 부끄러워하는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수치스러움 갖고 그날을 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곁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상을 통해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새롭게 나아갈 희망을 부여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장 씨가 아닌, 잘못된 과거에 물을 주며 자위하는 김 씨가 될 것이다. 


잘못된 과거에 매일 조금씩 물을 주면서 온실 속에 괴물을 키우며 자위하는 김 씨의 퇴폐성이 당시 우리의 무기력과 잘 조화되었다.     


(2)  시점 교체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서술 방식 중 하나가 계속해서 교체되는 시점일 것이다. 5.18이라는 사건 자체를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루는가 이다. 시점이 교체되면서 여러 목소리를 번갈아 들려주기에 5.18이라는 사건에 대한 다각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러한 시점들의 교체로 상이한 인물들의 의식이 서로 중첩될 수 있다. 소녀로 상징되는 살아남은 자들, 장 씨로 상징되는 방관자이자 가해자일 수 있는 사람들, 소녀의 친오빠의 친구들인 우리들. 시점이란 작가, 화자, 인물, 독자 사이의 유동적인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즉 시점에는 단순히 사물이 관찰되고 의식되는 물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이 반영된다.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이데올로기를 지닌 독립적 주체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에워싼 주변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나 견해에 해당된다. 이데올로기와 인물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므로 인물 간의 대립이나 화해는 곧 그들이 대변하는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이나 화해를 의미하면서 상대방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과 평가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 씨, 소녀 우리들의 시점의 교체되는 서술방식은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가치관의 화해를 불러오는 치유를 담당한다.

 또, 시점의 자유로운 변화와 교체는 누가 말하는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누가 경험하는가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작품 전체를 병렬 구조로 만들기에 자기 나름의 인생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으로 인물들의 이야기가 차례대로 조명되면서 5.18 이후에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3)  여정

 여행은 이전의 익숙했던 세계를 떠난다는 점과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일탈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탈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장소의 이동을 통한 해방이다. 부정적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여행이기에 그러한 여행의 의미는 변화와 거부 그리고 저항이다. 

 <꽃잎>은 오빠의 무덤을 찾는 소녀의 여정과 그러한 소녀를 찾는 우리들의 여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소녀의 여정은 그날이 있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을 보여주며, 이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로 강과 바다를 제시한다.


나는 이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 나는 이제 갈 데가 없어. 오빠의 무덤밖에는. (283)
어느 날 강변을 멀리까지 따라간 후에 나는 목적지인 바다를 잊어버렸어. (…) 강을 건너고 나서 나는 길을 떠난 후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어.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았어. (240)


또한, 오빠의 무덤을 찾는 여정에서 소녀는 검은 장막을 벗겨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여정에 대한 의미를 확인한다.

 

나는 꼭 오빠를 찾아야 해. (…) 무슨 한이 있어도 그 장막을 벗겨내야 돼. 역시 나는 길을 떠나기를 잘했어. (221) 


다음으로, 우리의 여정은 소녀로 상징되는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와 그들의 삭제된 말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표현을 빌리자면, 묵살의 여정을 거슬러 가는 과정이다.  국가 폭력에 의해 묵살된 목소리는 여정을 통해 되살아난다.


지도 위의 선과 점들은 모두가 착시를 유발할 뿐이다. (…) 말이 삭제된 무한한 내적 요인을 동시에 추리해야 하는 복잡한 이동이 된다. 그녀의 무분별한 여정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가능한 내면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 속에서 그녀와 같이 머무르면서 내면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 우리를 먼저 떠나버린 친구의 누이동생의 흔적은 이미 상실해버린 꿈처럼 우리의 빈곤한 일상의 갈피에서 매 순간 생생한 상처로 되살아 났다. 그것이 우리의 여정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확실한 지도였다. (227-228)



 그녀를 추적하는 우리의 여정에서 지도가 되어주는 것은 매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상처다. ‘우리들’은 소녀를 찾기 위해 떠났지만, 사실 그녀를 찾아내는 가는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된다. 그녀를 만난다 해도, 그녀는 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지만(285), 그녀의 내면에 머무르며, 매 순간 생생한 상처와 고통들을 겪는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기적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라도 살아 남아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그녀의 생명 자체가 아니겠는가. (253) – 6장
그녀를 무서워하지도 말고, 그녀를 피해 뛰면서 위협의 말을 던지지도 마십시오. 그저 그녀의 얼굴을 잠시 관심 있게 바라보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당신의 길을 잠시 막아서는 그녀를 구타하고 넘어뜨리고 짓밟고 목을 졸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고 싶은 무지스러운 도피의 욕구가 일어난다 해도 말입니다. 설령 당신이 그렇게 한다 해도 또 다른 수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언젠가는, 실성한 시선과 충격에 마모된 몸짓으로 젊은 당신의 뒤를 쫓아와 오빠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205-206)



여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파하는 그녀의 생명 자체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상기시키는 그녀의 흔적들에 대해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저기 소리 없이 지는 한 점의 꽃잎’은 5.18이라는 제1의 폭력에 상처 입은 자들이 이후에 남겨진 자들의 망각과 방관이라는 제2의, 제3의 폭력으로 소멸할 위기에 처해있음을 형상화한다. 최윤은 소설을 통해 절망적으로 희미해져 가는 소녀의 흔적으로(227) 상징되는 그날의 기억을 소멸시키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Ⅲ.     상징적 이미지

 작품에서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상징적 이미지들은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추상적인 고통을 시각화, 구체화시킨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통해 상징적 이미지를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이미지는 “우리에게 응시하라고 강요하는 인상들, 우리에게 해석하라고 강요하는 마주침들, 우리에게 사유하라고 강요하는 표현들.”이다. 작품 속의 상징적 이미지는 우리에게 응시하고, 해석하고 그리하여 사유하게 만든다.   


 1.    검은 장막


 작품 속에서는 검은 장막, 회색 잠, 하얀 평화의 나라와 같이 색채를 입힌 고통의 단계들이 등장한다. 이 3가지 상징적 이미지들은 5.18이라는 기억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이 택하는 잘못된 대응방식들을 보여준다. 소녀는 5.18을 경험함과 동시에 그날에 대한 악몽을 검은 장막으로 가려버린다. 

 


아니 내가 엄마 몸에 구멍이 나는 걸 봤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시커먼 휘장이 펄럭거리고 다가와 나를 덮쳤고 내 손을 움켜쥔 엄마와 같이 ……그냥 엎어졌나? 벌써 수천 번이나 생각해봤잖아. 그 휘장 다음은 아무것도 없어. (…) 모든 기억이 내 눈을 덮치던 검은 휘장에 말려 다 녹아버렸어. (216-217)


5.18이라는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로 등장한 검은 장막은 소녀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 자멸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이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날은 아프지만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고, 오빠에게 전달해주어야 하는 이야기이다. 9장에서 이에 대한 자각과 트라우마의 극복이 함께 드러난다. 



그래 검은 휘장은 있지도 않았어. 내가 마귀 같은 손으로 검은 휘장을 두껍게 쳐놓았던 거야. 그리고 말하곤 했지. 절대 다시는 생각하지 말아. (271)
내가 내 손으로 짜 놓은 검은 휘장은 이제 다 낡아버린 거야. 아니, 그러니까 검은 휘장은 있지도 않았어. (272)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회색 잠이다.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이라는 색채를 통해 고통의 중간단계를 표현하고 있다. 


날파리 떼처럼 무더기로 사방에서 덤비는 회색 잠과 온몸으로 싸웠지. 뒤통수 근처에서 단지 펄럭거리기만 하면서 덮칠 기회를 보며 위험을 경고하는 검은 위장의 자락을 움켜쥐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지. (257)
자면 안 돼. 길을 잃어버려서는 안 돼. (222)
그녀가 대항해 싸운 것은 어쩌면 잠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224)


 회색의 잠은 검은 장막처럼 소녀가 빠져서는 안 되는 부정적 상태다. 잠에 빠진 소녀는 희생자들의 얼굴이나 딱정벌레가 등장하는 끔찍한 꿈을 꾸게 된다. 검은 장막은 아예 그날의 기억을 없었다는 듯이 잊고 지내게 만드는 것과 달리, 회색의 잠은 소녀가 악몽을 꾸게 만든다. 그날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끔찍했다는 부정적 감정 만을 기억하는 태도일 것이다. 회색의 잠은 소녀가 계속해서 싸워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얀 평화의 나라는 죽음을 상징한다. 소녀는 끔찍한 기억들로 인해 끊임없이 괴로워할 바에야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유혹에 종종 빠진다. 죽음은 간편하게 이 모든 것을 끝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달콤한 유혹이 순간 손을 벌렸어. (…) 내 목을 졸라 하얀 평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게끔 나를 내맡기는 것. 물보다도, 유리보다도 더 투명한 그 기억의 막에 바로 내가 흰 페인트칠을 했던 거야. 그 끔찍한 사람들처럼 나도. 내가 죽어버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내 몸에 칠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색깔이었으니까. (261) 
그 지하 지대가 남자에게 백색으로 보였다. 시신이 타고난 다음의 뼛가루의 그 백색 그러니까 이야기될 만한 고통거리 마저,  타버린 살처럼 모두 제거된 곳. (270) 

 소녀의 시점 외에 장 씨의 시점에서도 백색은 죽음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광주학살의 자리에 있었던 한 특전사 병사에 따르면, 당시 군에서는 시위 주동자를 잡기 위해 화염방사기에 페인트를 넣고 쏘아 맞힌 다음 잡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현장에서 튀김가루에 묻혀 튀긴 듯 하얀 페인트로 범벅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고 진술한다. 최윤이 그날의 참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진술들을 참고했을 수도 있다. 또는, 검은 장막과 회색 잠과 함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시각화시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죽음은 대답이 없다. 역사의 증언을 해줄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날의 사건은 폭동이 아닌 민주항쟁 혹은 학살로 올바르게 기록될 수 있을까. 그녀는 살아남았기에 이 이야기를 완성시킬 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곧 오빠의 무덤을 찾아가 그날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혹독하게 생생한 사건이 된다. 죽음은 대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완성되어야 할 것의 미완성이기 때문에. (285)
고통에는 종류도 구별되는 색채도 없다. 모든 고통은 한 길로 통하는지도 모른다. (252)


최윤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된 유혹들을 떨쳐내고 도달한 그 길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얼굴

소녀는 여정 내내 희생자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자신의 것도 포함된다. 


늘 동일한 질문, 왜, 그날, 거기에. 왜 엄마를…… 늘 동일한 강도의 고통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이 고통 속에 어느 순간 얼굴들이 둥둥 떠오르고 사건이 거센 물살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흐른다. (…) 그녀는 모든 얼굴들을 두서없이, 선택 없이 그녀의 핏속에 용해해서 녹음해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은 감당하기 힘든 많은 얼굴들을 녹음해두느라 피폐해버렸을지도 모른다. (225) – 3장
유리창을 들이받았어. (…) 그 얼굴은 산산조각이 나서 보이지 않았어. 그 얼굴이 마침내 박살 나버린 거야. (259)


매번 그 얼굴이 자꾸 멀어져 가는 지평선 위를 떠다니면서 내게 길을 가르쳐주었지. (260)
내 머리 뒤에서 합창하는 그 수많은 얼굴들.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들. (280)


얼굴을 떠올리는 행위는 희생자들과 자신의 고통을 보는 것이다. 이 얼굴들은 소녀에게 길을 알려준다. 아감벤에 의하면, 얼굴은 열림이며, 소통 가능성이다. 얼굴 즉 고통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들과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3.    

 소녀는 여정 중반부에 강을 건넌다. 강은 천천히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는 속성으로 인해 역사와 결부된다. 강을 따라 걷는 소녀의 이미지를 통해 시간이 흘러 희미해져 가는 5.18이라는 역사의 모습을 드러낸다. 


강변을 따라 물살의 흐름을 따라 걷기 시작했지. 모든 것이 희미해졌지. (239)
이제 와서 저 강을 다시 건널 수는 없잖아. 이제는 영영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 (240)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시 강을 되돌아 건너는 일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245)


강은 또한, 소녀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자 이 얼굴들은 강물아 모두 너의 것이다. 나는 힘이 없고 내 머릿속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으니 내 대신 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으렴. 어느 날 내 머릿속에 장막이 걷히고 내가 나를 그늘 없이 사랑하게 될 때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만 간직하고 있으렴. 고마운 강. 안녕,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240)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군사정권 당시 한국 경제는 고속성장의 길을 걸었다. 전두환에 앞서 박정희가 18년간 절대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세운 근대화 시나리오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을 모델로 그들이 1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이룩한 근대화를 단기간에 이루겠다는 맹목적 확신. 그가 죽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된 것은 속도의 신화다. 인간의 생명력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맹목적인 속도의 근대화. 우리 국민들은 그것에 열광했다. 그리고 이러한 광적인 속도 숭배는 우리에게서 인간다움을 위한 자기반성의 시간과 가능성을 박탈했다. 

 무자비한 속도의 광주학살과 사후 처리. 신속한 권력의 장악. 전두환과 신군부야말로 속도 숭배의 사회에서 국가 권력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집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두환의 야만을 용인했다고 볼 수 있다. 강은 가해자에 위치에서 서있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에게 조국 근대화를 약속했던 박정희가 죽고 난 빈자리. 우리 대다수는 그가 약속했던 낙원을 대신 실현시켜 줄 과단성 있는 권력을 고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은 본래 느리게 흐르고 고통을 덜어주는 역사를 상징했지만, 5.18과 함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역사로 자리 잡게 된다. 

 최윤의 문체는 풀어지면서 번지고, 흐르면서 흡수되는 강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그녀의 문체와 강의 공통된 속성을 통해 둘 중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역사로의 강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Ⅳ.      결론

 <꽃잎>에서 등장하는 여성적 진술 방식과 상징적 이미지들을 통해 최윤의 문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살펴봤다. 침묵, 내적 독백, 광인으로 상징되는 성찰적 서술방식과 회상, 시점 교체, 여정들로 상징되는 치유적 서술방식들을 통하여 여성적 진술 방식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상징적 이미지들을 통해서 추상적인 고통의 개념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묘사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날의 아픔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리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최윤의 문체는 희미해져 가는 광주의 악몽을 명료하게 살려내었기에 리얼리티를 떨어트린다는 지적은 옳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녀의 문체는 풀어지면서 번지고, 흐르면서 흡수되는 강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따라서 그녀의 문체에 대한 고찰은 군사정권 이후 퇴색된 역사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녀의 문체를 통해 <꽆잎>은 단순히 5.18이라는 사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현대사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 기본자료>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 지성사, 1992  

<참고문헌>      

    김미현, 「한국 여성소설과 페미니즘」, 신구문화사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삼인출판  

    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 지식하우스  

    전경옥, 「한국여성문화사3」,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편 1권, 광주학살과 서울 올림픽」, 인물과 사상사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난장출판  

    릴라 간디,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 현신물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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