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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Nov 09. 2019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와 영화 <꽃잎>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속 인물들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위치확인을 통한 반기억의 형식에 대해


Ⅰ. 서론

 

 역사가 아닌 기억에서 망각되거나 망각될 경향이 있는 기억을 반기억이라고 한다. 가령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다룬 이순신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처럼 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어떤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을 두고 반기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유의 과정이나 순간적인 인상, 조각난 회상 등을 형상화하며, 전지전능 시점으로 대변되는 하나의 체계적인 기억 대신 대상을 따라 끊임없이 떠다니면서 우연한 사건과 사실에 대한 반기억 들을 찾아낸다. 이는 일관된 기억의 체계와 무관한 파편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은 전형적인 반기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등장인물들 마다 다른 개인적 경험들과 반응들을 서술하는 형식이 그러하다. 연속성과 하나의 체계를 거부하는 반기억은 주체의 내면이나 의식에 집중하는 문학 작품들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소설의 경우 내면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술에 집중하는 뚜렷한 반기억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영화의 경우 소녀를 제외한 장 씨 혹은 우리들의 내면 독백은 전반적으로 삭제되었다. 

 또한, 「꽃잎」은 장 씨, 소녀, 우리들의 시점이 교차되어 서술된다. 이들은 80년 5월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저마다 자신들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모든 인물이 광주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기억은 광주학살의 폭력으로 생겨났던 가해자와 피해자처럼 두 가지의 관점들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간다. 주목해야 할 것은 등장인물들은 모두 절대적인 가해자나 혹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의 진실은 그 기억의 실제성보다는 그 기억을 하는 집단이 처한 현실성에 달려있다. 「꽃잎」은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을 리얼하게 고증하는 것에 집중했다기보다 집단마다 달라지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의 차이와 그 차이를 확인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끌어내고 있다.

 소설을 중심으로 「꽃잎」에서 드러난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된 인물들의 목소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또한, 5월의 광주라는 역사에 대해 다르게 기억되는 모습들을 확인함으로써, 소설이 채택한 형식인 반기억이 얼마나 적절했는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Ⅱ. 본론

   1.    소설과 영화의 차이

    (1)   장 씨

「꽃잎」은 5.18 이후 어머니를 잃은 소녀가 오빠의 무덤을 향하는 여정과 그런 소녀를 찾아다니는 우리들의 여정이 함께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잠시 소녀와 지냈던 장 씨의 기억이 등장한다. 장 씨와 소녀의 만남은 겁탈로 시작된다. 장 씨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소녀를 대하게 된다.


너무 쉽사리 벗겨져가는 여자애의 누더기에 당황하면서, 도피하기 위해,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빈곤한 신체를 공격했다. (209)
쥐처럼 소리 없이 움직여 다니고 내던지면 내던져지고 꺾으면 꺾이고 욕설과 구타를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흔적없이 다 받아내고 (…) 여자애의 존재는 그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과 함께 누구에게인지 모를 분노의 감정을 유발시켰다고 말했다. (211)
다시 한번 남자는 이제 악취까지 풍기면서 존재를 공표해오는 저 계집애를 가루가 되도록 두들겨 내쫓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 그는 무엇 때문에, 매번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격렬하게 솟아오르는 폭행의 욕구를 초인적인 힘으로 다스려야 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212)


 소녀를 향한 장 씨의 폭력은 무력감에서 비롯된다. 그는 소녀를 보면 알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고, 불편함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녀를 구타한다. 소녀와의 폭력의 상하관계에서 그는 우위를 선점하고 있지만, 그는 전혀 편안하지 않다. 가해자로서의 위치는 되려 그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폭력은 알 수 없는 무력감과 공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피해자로의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정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은 가해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직시하는 것이다.


그는 눈앞에 쓰러진 막대 같은 몸뚱어리를 보기가 무서웠다. 남자는 왜, 무엇 때문에 그가 이 여자애를 이 지경으로 구타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언제, 어느 순간에 격렬한 첫 번째 파동이 그를 사로잡았는지 기억해내고자 그 자신의 마디진 두 손을 눈이 시리도록 직시했다. (214)
무엇이 저 어린애를 저 꼴로 만들었을까. 질문을 채 던지기도 전에 그 꼴을 만든 데 자신도 한몫 낀 것만 같아 먼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241)
어쩌면 그 끔찍한 어떤 일의 한 중간에서 엉뚱하게 자기 자신의 얼굴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처럼 드러날 것이 무서워 남자는 더 생각하기를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244)


 폭력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찾는 것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18의 폭력성의 기원을 찾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고통당하는 자의 목소리에 타인이 반응할 때, 그 고통은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개인적 고통은 사회적 고통으로 전환되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으로 환원된다. 왜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는지, 비극의 가해자는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피해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떠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의 치유 가능성이 생겨난다. 추후에 살펴볼 소녀와 우리들은 모두 자신들이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의 위치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장 씨는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폭력과 결부되어 있는 인물이다.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직시하여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여자애를 날뛰게 하던 경련적인 자해의 리듬이 그의 몸속에서 끓어오르곤 하던 가해의 리듬으로 이전되었다. (214)
남자는 매 구절마다 자책하고 있었다. (…) 우리는 그 남자를 위로하지 않았다. (289)


 장 씨를 소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로의 위치만을 확인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를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은 이러한 부분들이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가해행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을 불편해하며 회피하기 쉽다. 따라서 스스로를 자해하는 행위로 가해의 사실을 모면하고자 한다. 가해의 리듬이 자해의 리듬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가 이를 입증해준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 개인들은 자신은 시대의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러한 피해의식을 통해 자신들의 행위는 용납될 수 있고, 개인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에 책임이 있다는 체념적인 논리에 머무르게 된다. 이로 하여금 자신들의 폭력 행위들을 피해의식을 통해 은폐하게 된다. 가해자는 피해자로 둔갑하고, 폭력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가해자로서의 역사는 망각되고 피해자로서의 역사만이 기억될 따름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반기억의 형식은 장 씨의 회상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기억과 피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인 구조들을 통해 다양한 개인들의 관점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무엇이 옳은가를 독자들이 직접 판단하게 된다. 


남자는 더 이상 여자애에게 술을 먹이지도 않았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녀를 학대할수록 그다음 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의 손찌검이 여자애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그의 신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241)
남자는 여자애의 빈 시선 속에서 고통스럽게 그 자신의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을 찾고자 했다. (245)




소설과 달리 영화 속에서 자신의 가해행위를 깨닫게 되는 장 씨의 모습은 많이 삭제되어 있다. 무덤에서 소녀의 과거를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소녀에 대한 동정이라는 감정을 느낄 뿐, 스스로에 대한 문제 인식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소설의 경우 장 씨의 의식의 흐름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기에 그는 자신의 폭력성을 시정하게 된 계기와 당위성을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된다



(2)   소녀


 소녀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광주의 폭력성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녀는 오롯이 피해자로만 존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엄마 손아귀의 뼈마디를 느꼈을 때 구멍은 이미 콸콸 흐르는 피에 엉겨 보이지도 않았어. 엄마가 내 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을까. (216)
아, 그날 나는, 어쩌면 엄마를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 엄마, 구멍나버려 고꾸라지던 엄마. 내 이 손이 빨리 썩어야 될 텐데. 아니면 독물 속에 첨벙 집어넣어 녹여버리든지. 아직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생생한 엄마 손의 촉감. (273)
그리고 이후 나는 다시 그날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어. 내 끔찍한 범죄의 자리. 나 혼자 살아남으려고 나는 엄마의 손, 팔, 흰 눈자위를 내 발로 짓이겼어. (…) 내가 엄마의 꿈을 짓이겼지. (283)


 그날 엄마는 소녀를 살리기 위해 손을 잡고 도망치다가 죽는다. 소녀는 뜨거운 엄마의 손과 얼굴을 짓밟고 살아남는다. 그녀는 그 상황이 무서웠고,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 자신을 가해자로 위치하게 만들었음을 확인하며, 이 사실로 인해 미쳐버린다. 검은 장막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잊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직시하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을 검은 휘장으로 덮어버린다.


부서지는 것 같은 엄마의 몸뚱어리, 일그러져 허겁지겁 맞기 전에 내 이름을 입 안에 담은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검은 휘장, 두껍고 깜깜한 휘장이 내 눈을 덮어버렸어. (230) 


하지만, 소녀는 오빠의 무덤을 향하는 여정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차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은 독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서움이 너무 커서 나는 부서질 것만 같은 등뼈를 추스르고 벌떡 일어나 사방을 휘돌아보며 꺼억꺼억 까마귀 소리를 냈어. 달도 없는 밤, 커다란 육식 조류의 날개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덮어 내리고 있는 구름장 (…) 어디서부터인가 새벽이 올 텐데. (231)


밤새도록 기다렸던 새벽빛인데, 그 빛이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는 것이 죄스럽고 무서웠어. (234)


소녀는 까마귀 소리를 내고 이 까마귀는 육식 조류다. 육식 동물은 누군가를 다른 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존재다. 생존을 위한 자신의 본능적 행위에서 비롯된 자신의 가해자로의 위치를 육식 조류와 빗대어 고백하고 있다. 소녀는 햇빛이 비추는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새벽의 햇빛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확인해야 하기에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피해자의 논리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려 한다.


그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수천 마리가 덤벼보라지. 나는 절대 소리를 지르고 무릎을 꿇거나 빌거나 하지 않을 거야. (237)
나는 울지 않았어. 사람들이 나한테 돌을 던지고 나의 흉측해진 몸에 침을 뱉고 두들길 때 나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어. 염천에 갈라진 논바닥이 흠뻑 내리는 물줄기를 빨아들이듯이 나는 모든 것을 달게, 눈을 감고, 사지를 펼친 채 받아들였어.(254-255)
내 손을 까맣게 태워 버릴 것만 같은 엄마 손아귀에서 손을 빼려고 너는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지 (…) 그런데 소용돌이 속에서 굳어져버린 엄마의 손이 너를 놔주지 않았어. (…) 너는 급기야 한 발로 엄마의 내팽겨쳐진 팔을 힘껏 누르고 네 순을 빼어냈어. (…) 엄마의 근육살이 발 밑에서 미끈거렸지. 너는 사력을 다해 밟았어. (…) 몇 얼굴을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몇 얼굴이나 네 다급한 발길로 차 내던졌는지도 모르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으로 뛰어들어갔어. (282)


 소설의 경우, 자신의 가해 행위를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든 노력들은 소녀의 몫으로 남겨진다. 소녀는 피해자로서의 그날만을 기억하지 않고, 가해자로서의 그날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이러한 소녀의 노력이 삭제되어 있다. 


 소설에서 그날의 끔찍함으로 형상화되는 딱정벌레를 쫓아내는 것은 소녀의 역할이다. 오직 혼자만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검은 휘장을 벗겨낼 용기를 갖게 되고 그녀는 가해자로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백마 탄 남자가 등장하여 괴물들을 물리치고 소녀를 구해낸다. 소설에서 없던 내용을 영화에서 새롭게 삽입시킨 것이다. 이 장면들은 소녀의 피해자로의 위치만을 부각한다. 그녀는 불쌍하고 나약한 존재이며 스스로 이를 극복할 수 없는 인물로 변모한다. 이러한 장면은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기억하려는 본래 소설의 의도를 왜곡시킨 각색으로 보인다.


남자도 그녀도 각자 다른 고비를 한 고개 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여러 번 이 같은 고비를 넘길 것이다. 아니면 매 순간이 고비이고, 그들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내딛는 매 발걸음 밑에 지뢰가 있었으므로 이 순간이나 저 순간이나 그다지 구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214)


장 씨와 소녀가 모두 넘어가고 있는 고비는 피해의식에 갇히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들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이유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안전하고, 간편하고, 고통스럽지 않기에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3)   우리들

 친구의 누이동생을 찾는 우리들은 맹목적으로 소녀를 찾을 뿐, 여정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여정에서 소녀의 상처만이 그들의 지도가 되어주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착시를 유발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 우리를 먼저 떠나버린 친구의 누이동생의 흔적은 이미 상실해버린 꿈처럼 우리의 빈곤한 일상의 갈피에서 매 순간 생생한 상처로 되살아 났다. (227)


 우리들은 그날의 일을 직접 겪지 못했다. 다만 섣불리 그날의 피해자들의 상처를 어림잡아볼 뿐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타인의 아픔에 대해 정의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의 정도는 오직 그들만이 아는 것이며, 섣부른 정의나 짐작 혹은 동정 또한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성숙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는 폭력을 자주 저지른다.  


살기를 그친 산 사람을 만나는 일이 보는 이에게 얼마나 극심한 고문일까. 이것을 사람들은 단순히 미쳐버렸다고 자주 말한다. 얼마나 간단한 말인가.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면 다시금 세상에 질서가 잡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 이구동성으로 친숙한 이름들을 들먹거리고 무릎을 쳐가면서, “글쎄 그 친구가 그만 돌아버렸다는 구만” 하고 딱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285-286)
무연한 풍경 위에 고르게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프지 않은 채찍처럼, 그러나 애무라고 하기에는 강하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다스림의 매질처럼 비가 땅 위에 내리고 있었다. 차는 더욱 덜컹거렸다. 점점 더 지나치게 덜컹거리는 차의 요동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몸을 내맡기고 승객들은 꼭두각시처럼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앉아 있었다. (246)


 미쳐버렸다고 정의해버리면 간단하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소녀의 고통의 몸부림을 그저 동정해버리면 그만이다. 그 일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자로 남을 수 있으며 그 일에 대해 자신은 무관하니 어떠한 책임을 묻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건과 관련되지 않은 우리들조차도 가해자일 수 있는 것이다. 상처를 남기지 않아 확인하기 쉽지 않은 경미한 폭력성 즉 다스림의 매질에 대해 그저 몸을 내맡기고 가만히 있는 것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적 같은 것에 기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뚜벅뚜벅 걸어 우리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피로가 우리를 미신적으로 만들었고 잠시 정신을 깨었을 때 자학적이 되었다. (285) 
그러나 가끔 가다 미소 지은 입술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무너지는 충격과 함께 우리의 착시 현상도 끝이 났다. (287)


 미성숙하고 나약한 우리들은 동시에 소녀의 환영을 본다. 환영 속에서 소녀는 웃고 있었다. 그들은 충격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한다. 소녀를 도울 수 있다는 경박한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여정을 시장한 우리들은 그럴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자신들의 소중한 친구의 가족들이 죽은 그 날의 도시를 섣불리 치유하겠다고 나선 자신들은 그들의 고통을 자기들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피해자인 소녀를, 피해자로서의 역사만을 찾아 헤맸던 우리들과 달리 소녀는 가해자임을 확인하고 가해자로서의 역사까지 끌어안고 ‘지복의 미소’를 보여준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입장에서 상처를 주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해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 우리는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5.18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모두가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 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미소가 그녀를 찾아 떠난 우리의 동기들이 모두 경솔한 것이라고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아 우리는 말짱하게 잠이 깬 채, 새벽까지 남은 시간을 왜 우리가 그녀를 찾고자 여행을 떠났었던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데 보냈다. (287)
 그날, 그 도시, 그 이후 무언가를 했어야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사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리의 미성숙한 고통을 섣불리 치유하기 위해서? 그녀의 모습에서 끔직함의 구체적인 흔적을 찾고자 하는 자학 심리? 아니면 이미 피폐될 대로 피폐된 그녀를 보호해주겠다는 경박한 인도주의? (287)




 영화는 소녀의 환영을 보는 장면에서 미소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착시 장면이 의미가 있는 것은 소녀의 미소를 통해 우리들의 미성숙함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백마 탄 왕자의 장면, 소녀의 미소가 부재된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의 자립성과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원작의 의도를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영화의 이러한 각색들은 5.18이라는 역사를 기억하는 반기억이라는 소설 형식의 미를 잘 살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2.    영화 각색의 노력과 아쉬움

 

 근대 100여 년의 격변기에서 영화는 산업, 사회, 정책을 매개하는 대중문화의 일부로서 시대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형태를 구성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영화의 제작과 상영은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비롯된 정책과 법제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영화 ‘꽃잎’은 95년까지 지속되던 영화법의 검열에서 벗어난 199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따라서 이전 시대의 영화들과 다르게 정부 비판적인 내용들이 다뤄지고 있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는 5.18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 시대적 상황을 그려내는 데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보고 듣는 TV나 라디오들을 통해 군사정권에 이용되던 언론들을 그려내고 있다. 9시가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전두환 각하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땡전뉴스나 5 공화국 헌법 공포식에서 전두환의 연설 장면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갑작스럽게 흘러나오는 애국가와 국기의 경례에 대한 장면을 통해 애국심 고취를 통한 군사정권의 권력의 비밀을 폭로하고 있다. 멈춰 서 국기의 경례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소녀는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간다. 일상에서 국가주의에 동원되었던 국민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소녀의 모습을 그녀가 광기는 잘못된 체제를 꼬집는 목소리로 작용하게 된다. 

 원작에 없던 이 장면들은 영화라는 시각적, 청각적 매체이기에 가능하다. 이러한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군사정권의 횡포와 민주주의의 억압을 더욱 강력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질을 아는 것보다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그 대상에 대한 존중이다.” 영화는 5.18이라는 사건이 비롯된 80년대 군사정권을 있는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장면들 역시 존재한다. 우리들의 여정이 시작할 때, 기차에서 일행이 보는 커플의 애정행각과 김 씨와의 술집에서 보이는 나체의 여자의 사진은 원작의 주제를 흐리고 있다. 자극적이기에 관객의 집중을 순간적으로 끌어낼 수 있겠지만, 의미가 불분명한 색정적인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각색 과정에서 추가된 장면들은 영화의 아쉬움을 남는다.

  이 밖에도, 앞서 소설과 영화의 차이에서 자주 언급했던 내적 독백의 부재는 소설을 읽지 못한 관객들에게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 영화의 정적인 화면이 제시될 때, 관객은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전후 맥락을 고려하며 해독해 나간다. 관객의 수준과 관심도에 따라 집중하는 정도와 해독한 정보의 양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일관되게 내적 초점화를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이는 관객들의 집중도를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영화는 주관적 카메라에 의해 모든 대상을 초점화 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서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들은 메시지와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화면들에 주목할 위험이 있다. 

 또한, 영화는 영상과 음향의 연속이다. 영상의 기본 단위인 하나의 쇼트는 그 길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원작의 단어나 문장이 주는 의미들이 축약될 수 있다. 또한 감독은 한정된 상영 시간 내에 소설의 정보를 최대한 제공해야 때문에 원작이 지니는 시간성과 인과관계가 훼손될 여지가 높다. 영화 ‘꽃잎’또한 각색의 과정에서 감독이 주목하고자 했던 원작의 메시지와 장면들이 달랐기 때문에, 소설이 채택한 반기억이라는 형식과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인물들의 위치가 흐려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Ⅲ. 결론

 소설의 등장인물들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자각들에 대해 살펴봤다. 또한 이러한 자각을 통해 망각될 수 있는 기억을 역사로 남기는 반기억의 형식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없었던 영화의 새로운 각색들로 인해 인물들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메시지의 진정성이 약해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5.18이라는 폭력적인 역사에 대해 모든 이들이 가해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으며, 피해의식으로 회피될 수 있는 가해자로의 역사를 직면하고 있는 소설의 탁월성을 알 수 있었다.



1.     기본자료

-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 지성사, 1992

-      장선우, 「꽃잎」, 1996


2.     참고문헌

-      변학수, 「반기억으로서의 문학」, 글누림, 2016

-      변학수, 「서술방식으로서의 반기억」

-      김미현, 「한국영화 정책과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      김미현, 「한국 영화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2004

-      서정남, 「영화 서사학」, 생각의 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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