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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Oct 18. 2020

신호등 앞 소녀


하교시간이 한참 지난 초등학교

텅 빈 운동장에 점박이 축구공 하나

작은 어깨에 들린 커다란 가방

한 소녀만 홀로 가로지른다    


걷고 멈추고 다시 걷고

자줏빛 공은 스탠드가 되고

책 속에 꿀이라도 발라뒀나

책장은 멈출 수 없어

발걸음을 멈춘다    


30분이면 도착할 집을

3시간 만에 다다른다

걸음을 세운 이야기는

얼마나 위대했을까    


멀리서 신호등을 볼 때면

가장 느리게 건너던 그 소녀는

이제 가장 먼저 횡단보도를 지난다


가방은 여전히 무겁고

손에는 더 많은 책이 들렸지만

이제는 그 어떤 이야기도

아이를 멈춰 세우지 못한다    


주인공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그때만큼 멋진 이야기를

아가씨는 아직도 찾지 못한다    


훨씬 커다란 책장의 두꺼운 서사

찾지를 못해서 대신 쓰기로 했나

빠르게 횡단보도를 지나치는 어른을

멈춰 세울 이야기를 쓰기로    


나는 그저 나약한 소녀

공을 차지 못해 책을 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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