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사와 안나는 머물러 있지 않았다

<겨울왕국 2> (크리스 벅/제니퍼 리, 2019)

by 가람

To. 변하지 않는 것들을 노래하는 이들에게


오 년이란 시간의 겹


렛잇고 신드롬이 불었던 2014년 겨울, 저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술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친구들과 당당하게 칵테일바에도 들어가 보고 19금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습니다. 주민등록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는 일본 유학이었습니다. 비록 몸만 떠나는 불완전한 독립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로하고 나만의 삶을 꾸릴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유학길에 오르기 며칠 전 친척 언니와 함께 <겨울왕국>을 본 뒤 집 근처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겨울, 오 년이 흘렀습니다. 유학길에 올랐던 스무 살의 저는 스물다섯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파릇파릇한 신입생 시절은 금방 지나가고 힘들었던 첫 취준 후 무사히 졸업해 약 일 년간 간사이 공항에서 근무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만남과 경험이 있었던 시간의 겹 덕분에 저는 더 견고해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겨울왕국 2>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 바로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갓 스무 살이 됐을 무렵 봤던 영화와 재회하는 일은 괜스레 의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어른이 된 것 같은데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대로 일지, 혹은 그들도 나처럼 세월의 겹을 껴입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Some Things Never Change

변하지 않는 것을 노래하는 이유

<겨울왕국 2> (크리스 벅/제니퍼 리, 2019)


<겨울왕국 2>를 보던 날 저는 두 번째 입사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생활을 앞두고 어떤 변화가 나를 찾아올까, 그리고 나는 어떤 태도로 그 변화를 맞이해야 할까, 여러 고민들에 잠 못 이루고 있던 무렵 비슷한 상황에 닥친 엘사와 안나의 이야기에 치유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변치 않음을 갈구합니다.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집이나 직장을 구할 때도 안정성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계약서나 보증금 등으로 변치 않겠다는 맹세를 하죠.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는 만큼 영원한 것은 없지만 위태롭고 두려워서 일까요? 우리는 새로운 일 앞에서 두려워하고 좌절합니다.


변화를 대하는 태도 하나만으로 어른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다면 엘사와 안나는 저보다도 훨씬 성숙한 어른이 되어있었습니다. 변화가 무서워 아무런 계획 없이 일본에 남기로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일 년동안 글만 썼던 저와 달리 그들은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묵묵히 해냅니다. 어떤 후회나 망설임 없이 말이죠.


서로의 손을 잡고 해야 할 일을 위해 걸어가는 엘사와 안나. 이하 이미지 출처 : <겨울왕국 2> (크리스 벅/제니퍼 리, 2019)


<겨울왕국 2>의 재미가 1편보다 덜한 이유는 바로 이런 변화를 대하는 두 주인공의 자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보라 속에서 <렛잇고>를 부르던 동화 같은 요소는 줄어들고 철든 엘사와 안나는 본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에 바쁩니다. 기존의 <겨울왕국>이 현실 도피를 도와줬다면 <겨울왕국 2>는 우리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오 년 전 마법 같은 영상미와 자꾸 보고 싶은 캐릭터로 전 국민을 홀렸던 <겨울왕국>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탓도 있겠지만요.






Into the Unknown & Show Yourself

엘사와 안나가 변화를 대하는 태도


1편에서 엘사와 안나가 보여준 태도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도피'입니다. 아렌델 왕국의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엘사는 마법의 힘을 억제하고 숨기고자 은신처에 자신을 가두고, 안나는 성 안에서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꿉니다. 문제 해결이나 새로운 모험으로부터 도망쳐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죠. 물론 후반에는 두 자매가 서로를 구한다는 역경 극복의 시퀀스가 약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식 엔딩을 위한 장치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요?


반면 후속편에는 엘사와 안나가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기가 좀 더 현실적으로 담겨있습니다. <겨울왕국 2>는 '올라프가 다 해 먹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올라프의 비중이 크게 느껴지는데요, 그건 아마도 올라프의 대사가 <겨울왕국 2>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1편에서 "따뜻한 포옹을 좋아해"라는 명대사를 남긴 올라프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영원한 존재가 있는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자문하는데요, 영화는 올라프의 질문에 대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른이 되어 있을 거다'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먼 훗날 다 크면 세상 모든 게 이해될 거니까 다 괜찮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어떤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움, 호기심, 두근거림이 섞인 마음을 안고 우리는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습니다. 학생 때는 어떤 친구와 같은 반이 될까, 누구와 짝이 될까 사소한 변화에도 일희일비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더 넓은 새로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는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이십 대 중반을 바라볼 나이면 진지하게 각자의 미래를 고민하며 궤도를 수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나를 부르는 미지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출처를 따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나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숨겨진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모한 도전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겨울왕국 2>의 주인공들처럼 말이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미지의 세계가 부딪혀보니 별 거 아닌 경우도 있을 테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겨울왕국 2>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관객의 등을 떠밉니다.






Just Do the Next Right Thing

그래서 결론은


원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괴리에 고민하는 것도 어른의 한 역할입니다.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달라 고민에 빠질 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포기해야 할 수도,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제 궁극적인 목표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는 거지만, 안정적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글 쓸 시간도,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시간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시간도 뺏기게 되면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엘사와 안나에게도 서로 의지하며 아렌델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꿈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엔딩에서 엘사는 노덜드라 족의, 안나는 아렌델 왕국의 여왕이 되어 떨어져 살게 됩니다. 두 자매의 끈끈한 정을 보여줬던 1편의 엔딩과 달리, 엘사와 안나를 떨어뜨려 놓는 엔딩은 어른이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 어진 게 아닐까요?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게 바로 어른의 자세라는 걸 디즈니는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모한 모험 끝에 그들은 각자에게 소중한 존재를 지켜냈으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떨어져 있더라도 안나가 엘사에게 보낸 편지처럼 그들은 가끔씩 만나 벽난로 앞에서 게임을 하고, 졸리면 잠에 드는 행복한 순간을 즐길 것입니다.


함께 웃고 떠들다 보면 마음속 쌓였던 그리움도 녹아내리겠지요.


어쩌면 오 년 동안 관객들이 변한 만큼 엘사와 안나도 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텐데, 우리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티 없이 밝던 모습을 보지 못해 조금은 섭섭하지만 지난 계절 뿌린 씨앗이 익는 계절, 가을을 배경으로 성숙해진 엘사와 안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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