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러브, 2016)
To.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들에게
힘들 때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는 숙제입니다. 고난은 때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다가옵니다. 학생이었을 때는 성적 스트레스, 졸업을 한 뒤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직장인이 되었을 때는 하고 싶은 일을 향한 갈증과 허탈함, 그리고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인한 무기력함. 한 고비 넘어 성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땐 더 큰 고비가 찾아와 더 성숙한 태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다음에도 마찬가지고요. 단 한순간도 완연한 행복을 누린 적이 없어 매일 힘들어도 웃는 법을 연습하지만, 이 또한 어려워 좌절하곤 합니다.
눈앞에 그려지는 미래가 없어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세상이 깜깜해 보일 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자기 할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주변 인물들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마음의 심지를 꼿꼿이 유지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든 것을 잊고 몰두할 수 있는 직업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 힘들어할 때 위로해줄 수 있는 심적 여유와 돈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감정을 돌볼 줄 아는 애틋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저는 그저 기도합니다. 극복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버틸 수 있는 힘을 달라고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남들도 내가 버티는 만큼만 버텨줬으면 하는 생각을 숨길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달라고 말입니다.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러브, 2016)
영화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러브, 2016)은 반복되는 삶의 고통과 그걸 받아들이고 버티는 개인의 이야기를 조용하게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입니다. 첫 장면에서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근심 걱정 없이 가족들과 브루타뉴 별장으로 향하는 나탈리를 보여줍니다. 그때 그녀가 선실에 앉아 채점하고 있던 에세이 제목은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인데요, 영화는 이 의문에 답해가며 삶의 변화에 대처하는 한 인물의 모습을 좇습니다.
행복했던 때로부터 몇 년 후, 여전히 그녀는 철학을 가르치고 식구들과 단란한 나날을 보냅니다. 타인이 봤을 땐 이처럼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생활이지만 나탈리는 가슴에 응어리를 몇 개씩 안고 살아갑니다. 정신 불안 증세로 몇 번씩 전화를 하는 엄마,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남편, 급진적으로 변하는 사회 분위기, 점점 떨어져 가는 명성.
응어리는 삶의 고통이자 그녀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첫 장면에서 이 작품이 던진 의문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에 'No'라고 선을 긋듯이,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 자신보다 현재 닥친 상황과 상처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므로 그녀는 고통을 다른 에너지로 승화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작중 내내 나탈리는 거리를 걷거나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합니다. 마치 본인에게 다가오는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말이죠. 허나 도망친다 한들 그곳이 평생 천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화 <5시부터 7시 사이의 클레오>가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도망친다고 해서 고난을 극복하게 되거나 행복해지진 않습니다. 나탈리 역시 아무리 수업에 열중하고, 책을 탐닉하고, 바지런한 손놀림으로 집안일을 하고, 제자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녀가 열중하는 대상이 잠깐 동안의 달콤함은 줄 수 있어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어주질 못한 다고 말하듯이, 또다시 고난은 찾아오고 또다시 그녀는 혼자가 됩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
각자의 방법으로 나탈리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서는 남편도, 엄마도, 자식도, 제자도 결국 모두 그녀 곁을 떠나갑니다. 남편이 외도 사실을 고백하자 나탈리는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라고 행복에 파장을 일으킨 그에게 원망의 말을 하지만 남 탓을 한다고 해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극 초반에서 언급했듯이 타인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해주지 못할뿐더러, 그들에게는 그네만의 고민이 있어 나의 감정은 차선시 되기 때문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일들이 터지자 이젠 남들이 자신에게 주는 상처를 무마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던 임시방편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물이 가득 든 도자기에 작은 금이 간 것을 테이프로 붙이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죠. 시간이 지날수록 금은 점점 더 벌어져 결국 도자기는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고통이 찾아와 마음을 깨뜨려 놓았듯이 그녀의 마음의 파편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도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우리 감정은 기계가 아닙니다. 수리 한 번 맡긴다고 터진 마음이 제 기능을 할 리가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 시간은 다르겠지만 생채기가 무뎌질 때까지의 정해진 회복 기간이 필요하고, 회복을 위해선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줄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어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난 이렇게 노력하는데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결과가 보이지 않아.'라고 생각하면 회복을 위한 시간은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당장은 주저앉고 싶더라도 그 시간을 내 마음을 다독일 시간으로 여기고 의연하게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 게 더 현명하게 삶을 버티는 태도 아닐까요?
철학 선생님인 나탈리가 책을 낭독하는 부분이 작중에서 가끔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상황, 그리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중략)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삶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극복해야 할 과제를 던져줄 것입니다. 또, 극복을 위한 시간을 줄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혹은 남들이 내 고통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기대 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아물기 위해선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며 그 치유를 행하는 주체자는 '나' 하나이기 때문이죠. 나탈리도 이를 깨달은 것인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하는 것을 인정하고 본인 나름대로의 삶을 구축하려고 노력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남에게 자기감정을 퍼붓지 않습니다. 그저 다가오는 고통을 받아들이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죠.
Tomorrow is another day
지금 커다란 돌덩이처럼 느껴지는 삶의 문제는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면 모래알 보다도 더 작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도 행복은 분명히 있고, 그 맛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홀로 이겨낸 나탈리가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따뜻한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소소하게나마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죠.
칠전팔기 강인함의 대명사하면 나탈리 이전에 '스칼렛 오하라'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전쟁으로 고향, 집, 청춘, 사랑을 모두 잃고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고 말하는 스칼렛 오하라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삶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고통 속에 숨겨진 행복의 맛을 알기 때문 아니였을까요?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삶이란 그런 건가. 좋았던 시간의 기억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조금 비관적이긴 하지만 혹독하네."
그렇습니다. 조금 혹독하더라고 좋은 시간 약간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또 언젠가 그 고통을 보상해줄 좋은 시간 약간이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그때는 그때만의 고민이 있겠지만 적어도 행복이 나를 찾아온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충분히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시간은 눈 깜빡일 사이에 지나가 제대로 느끼려고 해도 충분하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긴 터널을 홀로 걸어온 우리는 행복을 즐길 권리가 있으니까요.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