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2014)
To. 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싶은 이들에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 모래사장 위에 적은 사랑, 유리잔 안에서 녹아내리는 얼음,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
여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모두 영원하지 않습니다. 손에 넣을 수도, 순간을 포착해 일시정지를 누를 수도 없습니다. 더운 날씨를 잊게 만들어 줄 만큼 유난히 화려하고 시원한 옷을 입고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춥니다. 형형색색 빛나던 불꽃이 사라지고 다시 하늘에 암흑만이 남게 되면 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강렬한 섬광은 우리 머릿속에 박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줍니다. 제대로 느껴볼 겨를 없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들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포장되는 것입니다. 여름을 배경으로 청춘을 그린 작품이 많은 이유도 이와 관련 있지 않을까요? 서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는 인생의 시기를 그리는 데는 모든 것들이 빛났다 사라지는 여름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2014)
판타지아 (fantasia):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악상의 자유로운 전개에 의하여 작곡한 낭만적인 악곡
오늘 제가 들고 온 작품은 말 그대로 여름의 순간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낭만'이란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감성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머리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부디 여름의 열기와 풀내음을 마음으로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나 원인과 결과를 따지기에는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지치지 않으셨나요? 어차피 이 날씨를 상징하는 것들은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꿈을 꾼다고 생각하고 작품 속에 빠져보는 것도 좋은 휴가가 아닐까요?
장건재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수상하였으며, 독립영화협회 선정 2015년 올해의 독립영화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할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일본의 한 작은 시골 마을 '고죠'를 찾은 한국인과 그들을 안내하는 일본인의 대화가 극을 이끕니다. 1부 <First Love, Yoshiko 첫사랑, 요시코> 2부 <Well of Sakura 벚꽃 우물> 이렇게 나뉘어 있어 전자는 흑백으로, 후자는 컬러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1부에서는 영화감독 '태훈'과 통역 담당 '미정', 그리고 마을 안내를 해주는 시청 직원 '유스케'와 '겐지' 아저씨가 주인공입니다. 젊은 이들이 떠나 노인만 남은 이 마을은 감(柑)이 특산품이라고 합니다. 주인공들은 작품 구상을 위해 식당, 학교, 다리 등 마을 곳곳을 둘러보고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 유스케씨는 원래 도시 출신이지만 어쩌다가 시골 마을로 발령이 났다고 하네요. 어릴 적 꿈은 연기자였다고 합니다. 겐지 아저씨의 첫사랑은 초등학생 시절 같은 학교였던 '요시코'라는 여자아이랍니다. 마찬가지로 대도시에서 영업 사원으로 근무를 했지만 힘들어서 고향으로 내려왔답니다. 그때 자주 가던 음식점에서 만난 한국인 아르바이트 생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감독이 밤하늘을 바라보자 불꽃이 피어오르는 장면으로 1부가 끝이 납니다.
2부 역시 고죠 마을이 배경이지만 이번에는 홀로 여행을 떠난 '혜정'과 관광안내소에서 만난 감 농장 직원 '유스케'가 주인공입니다. 2부는 천 쪼가리를 조각조각 내 서로 요리 붙이고 조리 붙인 퀼트 (quilt) 작품처럼 1부의 내용을 아름답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같은 듯 다른 듯한 설정과 대사, 행동이 반복되는데요, 어쩌면 2부는 태훈이 답사 후 구상한 영화의 일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연기자라고 소개하며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혼자 여행 중이라는 혜정, 회사원보다는 감 만드는 일이 좋아 마을에 남게 되었다는 유스케, 1부에서 등장한 아저씨와 할머니가 유스케의 가족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이야기는 아름답게 얽혀있습니다.
찰나의 순간이 만드는 아름다움
두 극(劇)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각각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꿈인지 현실인지 창작물인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위 해석도 제 의견일 뿐이고 관객은 마음 가는 대로 두 이야기를 받아들이겠죠. 형식의 제약 없는 악곡을 뜻하는 제목 '판타지아'에 걸맞게 이 작품은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극적인 전개나 빠른 호흡의 편집도 없습니다. 카메라는 때때로 주인공의 눈이 되어주기도 하고 상황을 설명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풍경과 인물을 쫓아가죠. 롱테이크 기법이 굉장히 많이 쓰이고 있는데 덕분에 진짜로 고죠 마을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해 줍니다.
저는 이 영화가 무언가가 이루어지기 직전의 모습만을 담고 있기에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습니다. 1부는 작품이 탄생하기 직전, 감독의 고뇌를 담고 있고 2부는 청춘 남녀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직전의 모습이 주제 아닐까요? 앞서 얘기했듯이 여름을 상징하는 것들이 그러하듯 영원하지 않으며 형태가 없는 것들일수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1부와 2부 모두 불꽃놀이로 끝을 맺는데요, 이는 찰나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뒤에 더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었기에 깊은 여운을 줄 수 있었던 것이죠. 또, 불꽃은 창작의 결실과 사랑의 확인이라는 아름다운 순간을 축복하는 메타포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어찌 되었든 간에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나면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몽환적인 기분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이도 금방 사라질 불꽃같은 감정이니 깊게 음미하며 여름을 느껴보시는 것 어떠신가요?
꿈에서 개연성이나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꿈은 꿈이며 금방 사라질 테니까요. 요즘 하늘이 오락가락해 좀처럼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거짓말처럼 장마도 끝나고 가을이 찾아오겠지요.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여름의 찰나를 담은 영화 보시며 쉬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