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 태어난 슬로우 스타터

by 가람

초여름에 태어난 곰을 아시나요


나는 영악하지 못합니다. 백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물길질을 하듯, 순환 궤도에 오르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은 들여야 하는 시작이 느린 사람입니다. 활자 인생 역시 더디게 시작됐습니다. 다섯 살이 되어도 가나다라를 몰라 한글 과외 수업은 그저 같은 그림 맞추기 놀이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글자를 쓸 줄 모르는데 다른 과목을 잘했을 리가 만무하죠.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부끄러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랬던 제가 글쓰기로 돈을 벌어 저축을 하고 커피를 사 마십니다. 글쓰기 인생 제1막이 올라간 건 2019년 2월입니다. 영악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벗어나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 해외로 떠나 홀로 5년간 지내온 날들을 스물여섯 편의 글에 녹여냈습니다. 처음 내 손으로 만들어간 독립, 사랑, 자아에 관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다신 돌아오지 않을 특별한 시간을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카톡 친구 수보다 구독자가 많아지면 기적이다’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한 도전이었습니다. 항상 목표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는 곰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역시나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 글은 멋진 포트폴리오가 되어 먹고살 길을 찬찬히 열어주고 있습니다.


먹고살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는 하나 딱 그만큼입니다. 좋은 걸 읽고 보고 느끼고 꾸준히 글을 써서 알리고를 반복하다 보면 더 넓은 길이 나를 반겨주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꿈에서 깨고 나면 남는 건 현실뿐입니다. 언제쯤 당당하게 나를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날이 올까 막막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질투와 수치


나는 시기심이 많습니다. 같은 출발선에 서 있던 이들이 나를 제치고 먼저 축하받는 일이 생기는 건 정말이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한’이나 ‘괴물 같은’이란 수식어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나 봅니다. 유튜브 추천 영상으로 뜨는 '아이돌이 공중파 1위를 하기까지 걸린 시간'을 보고 가끔 눈물이 나는 건 정상에 서기까지 안 보이는 곳에서 물길질을 했을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슬로우 스타터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사실은 한 계단 올라가기 위해 남들 배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다 지칠 때면 조바심이 나고 SNS에서 비슷한 소재를 나보다 더 맛있게 요리하는 이들을 보면 질투가 납니다. 단지 경력을 쌓으려고 매일 밤 야근을 하지만 180도 못 받아가며 남의 이야기를 쓰거나 글자 당 평균 3.25원을 받으며 알지도 못하는 제품을 찬양하는 글을 쓰다 보면 현타가 오기도 합니다.


어젯밤은 정말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런 원고를 청탁하면서 ‘작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올려두는 곳들도, 그걸 또 마감 시간에 맞춰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도, 그런 모습이 웃겨서 웃는 나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부끄러운 마음에 글 쓰는 사람이 된 지 1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나를 ‘작가’라고 당당하게 소개해 본 적이 없습니다. 글로 돈을 벌지 못하던 시절은 물론, 돈 버는 글쟁이가 된 지금도 말입니다.






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


언젠가 내 이름이 박힌 책을 출간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당당하게 작가로 불릴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책상 앞에 앉습니다. 글쓰기 인생 제2막이 언제 올라갈지, 얼마나 더 많은 글자를 써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쓰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글쓰기 근육이 붙어 더 대단한 글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한 글자 한 글자 써봅니다. 정말 쓰기 싫은 글도, 부끄러운 글도, 잊혀질 글도 있겠지만 아무튼 씁니다.


1995년, 봄도 여름도 아닌 유월 초에 태어난 저는 남들보다 느리게 세상을 탐험 중입니다. 20대 초반과 후반 사이를 걸으며 스물여섯 번째 초여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봄은 만물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여름에는 장미가 인사하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고 겨울에는 동백꽃이 핍니다. 각자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 피는 꽃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 묵묵히 쓰다 보면 나의 계절이 찾아오리라 생각하면서요.


사진은 작년 오월 중순. 막 피기 시작한 장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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