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조린 장조림

밀폐용기 운반 비밀요원

by 가람

밀폐용기에 관한 단상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절반 먹고 남긴 참치 캔을 굳이 조그만 밀폐용기에 담아 둔 것이 하필이면 내 눈높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저녁에 또 먹을 거 설거지거리만 늘어났네’라고 생각하면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어찌 요리의 잘함과 못함을 효율로만 따질 수 있으리라. 가끔 도를 넘은 절차와 철칙 때문에 진절머리가 날 때가 있지만 그것 또한 한 사람의 인생철학이라 생각하니 쉬이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의 요리에는 수십만 가지의 단계가 존재하며, 그 과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엄마도 소시지 하나 굽는데 스무 개 정도의 과정을 거친다. 효율이 떨어진다는 건 반대로 말해 정성을 가득 눌러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 가족이 날카로운 참치캔을 식탁 위에 놓고 먹게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 혹은 야식으로 소시지 하나를 구워도 파 기름으로 맛을 내 마늘과 함께 달달 볶아 감칠맛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런 정성 말이다.






밀폐용기 운반 비밀요원


요리에는 휘뚜루마뚜루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장조림은 후자에 속한다. 잡내를 없애 줄 마늘과 고추를 넣고 푹 끓인 간장에 다시 고기를 넣고 졸인 뒤, 밀폐용기에 담아 간장이 속까지 잘 스며들도록 냉장고에 넣어두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꼬박 하루가 걸리는 요리다. 할머니는 한때 주기적으로 장조림을 만드셨다. 스무 살 이후 5년 간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던 나를 위해서 말이다. 한국에 놀러 왔다가 캐리어 안에 인스턴트 음식만 잔뜩 담아가는 게 안쓰러우셨는지, 항상 본인이 직접 만든 요리 하나 정도 손에 들려 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런 연유에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면서도 그나마 상온에서 오래 버티는 장조림을 일본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해주셨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현재 눈엣가시가 된 밀폐용기를 랩과 비닐로 둘둘 말아 비밀 요원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운반했다.


1. 쇠고기 (홍두깨살. 혹은 우둔살, 사태)를 덩어리째 1~2시간 동안 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2. 쇠고기를 삼는다. (with 대파 1대) 다 삶아지면 고기는 건져내고, 삶은 물은 면보에 맑게 거른다.
3. 냄비에 삶은 고기와 맑게 거른 육수를 넣고 조림장을 넣고, 중간 불에서 20분 정도 끓인다. → 불은 약하게 해서 서서히 조리다가 국물이 반 정도 줄어들면 불에서 내린다.
*쇠고기 600g/물 8컵
*심심한 조림장: 간장 1컵, 설탕 1/2컵, 마른 고추, 마늘 (통) 1개, 생강 1톨


2004년, 나와 잠시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엄마가 받아 적은 할머니의 레시피.


집에서 김포 국제공항까지 2시간 남짓. 대기 시간을 포함해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 그리고 다시 일본 집으로 가는 시간 3시간. 대략 10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에 장조림이 상하지 않을까, 밀폐용기가 터져 캐리어가 엉망이 되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방 지퍼부터 열어 구석에 숨어있는 장조림 통을 확인한다. 다행히 한 번도 상하거나 터진 적은 없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확인한 뒤, 한 입 먹어보고 ‘아 이번에도 운반 성공이구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냉장고 깊숙이 넣어 두었다.






두 번 조린 장조림


자취방 옵션으로 딸린 냉장고 성능이란, 잠시 땀을 식히는 그늘 정도의 시원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냉장고의 가장 서늘한 곳을 찾아 넣어 두어야만 어렵게 가져온 장조림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다. 가장 맛있는 건 마지막에 먹는 부류지만, 이럴 때만큼은 상하기 쉬운 표고버섯이나 계란은 미리 먹어두었다.


장조림과 계란만 있으면 훌륭한 한 끼 완성이었다.


혹여나 상할까 두 번 조려 더욱 짜게 만든 일본 운반용 장조림을 즐기기 위한 방법도 탄생했다. 고슬밥 위에 버터를 넣고 장조림을 올린 뒤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준다. 밥이 식기 전 후다닥 계란 프라이를 노른자가 터질락 말락 하게 부쳐준다. 잘게 썬 파와 함께 프라이를 밥 위에 올려 비벼 먹으면 된다. 간이 심심하다 싶으면 단무지나 진미채 무침을 곁들여 먹으면 한 끼 완성이다.


만드는 데 반나절, 운반하는 데 반나절 걸리는 우리 집 장조림. 이런 식당이나 배달 앱이 있었다면 진즉 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들면서 한 번, 운반하면서 다시 한번 깊게 우려진 사랑의 맛은 다른 어떤 맛보다 진하다. 증거로 다 먹고 난 밀폐 용기 바닥에는 간장이 깊게 배어 있었다. 아무리 박박 닦아도 없어지지 않는 용기는 다음 한국 나들이 때 고이 들고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조금 느리게 사랑을 채워 넣었다.

작가의 이전글초여름에 태어난 슬로우 스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