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3화-계약서란
'노예' '계약'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므훗한 상상을 하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전 <해리포터> 시리즈의 도비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우리의 귀여운 집 요정 도비. 주인님 밑에서 일하다 주름투성이가 되었지만 양말을 받고 소녀처럼 기뻐하던 도비. “Dobby is free!” 명대사 하나로 전 세계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리던 도비. 그런데 도비도 참 바보 같은 게 계약서를 안 쓰고 그 오랜 세월을 노예처럼 일했다는 겁니다. 계약서 한 장만 있었더라면 그동안 당한 수모 모두 갚고 퇴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해학의 민족인 한국인은 취업이 되었을 때도 ‘도비가 되었다’라고 한 번 비꼬아 말합니다. 한 몸 다 바쳐 일할 곳이 생겼다는 건 응원해줄 일이지만 진짜 도비처럼 계약서도 안 쓰고 일하면 호구되는 겁니다. 계약서는 일을 건당 받아서 하는 프리랜서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이든 무. 조. 건 작성해야 하는 보호 장치입니다.
애인 하나로 족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지만 말이란 참 허망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와도 녹음이나 서면 증거가 없으면 사실을 증빙할 길이 없기 때문이죠. 어제 회의 중에 나왔던 의견대로 기획안을 정리해서 가져가도 본인이 한 말과 다르다고 한 소리 듣는 세상인데, 아이디어 회의보다 더 중요한 안건은 꼭 증거를 남기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통화 중 녹음은 필수, 계약 관련 사항은 이메일이나 서류 등으로 작성해 보관하는 건 더더더 필수입니다.
계약서 없이 서로를 향한 신뢰만으로 형성된 관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연인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해라고 속삭이던 사람이 갑자기 잠수 타고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한다 해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쌍욕 한 번 박아주고 잊으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사업주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떼인 돈 받아야 되는데 난 너 같은 사람이랑 일한 적 없다며 발뺌하면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증거를 만들어 두는 게 현명하게 살아남기 위한 습관입니다.
계약서라는 게 처음 보면 갑이니 을이니 해지니 손해 배상이니 무서운 말투성이라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고용주와 피고용자와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금이 그러하듯 의무와 권리가 양립하는 중요한 서류이기에 일을 하게 되면 꼭 작성하셔야 합니다. 그 종이는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가 되어 줄 테니 나중에 고용주가 딴 소리 할 때 얼굴에 들이밀면 됩니다.
또, 성과가 회사 기준에 못 미치거나 잦은 실수나 결근이 있는 경우 사업주가 계약 해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횡령 정도 하지 않는 이상 해고는 쉽게 안 당하니 안심합시다. 혹시라도 해고당하면 실업 수당 받을 수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자구요.
가끔가다 계약서를 요구해도 안 써주는 곳이 있기는 한데, 그런데는 고소하면 사업주가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사업 운영을 안 해봐서 계약서 안 써주는 사장의 심보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으면 사업주에게나 피고용자에게나 불리한 사항이 많아집니다.
작성 시기는 경험상 입사일이나 입사 전 오리엔테이션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출근하는 날에는 주민등록 등본, 통장 사본, 인감이나 멋진 싸인 정도 준비해 가는 것도 철저해 보이고 좋습니다. 대표 혹은 인사담당자와 일대일로 앉아 계약서 내용을 훑어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본 뒤 서로 싸인해서 한 부씩 나눠 갖는 게 이상적인 절차입니다.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로기준법 17조에 의거한 근로계약서 필수 사항]
1. 근무 장소/업무 내용
2. 임금 구성 항목
3. 임금 계산 방법
4. 근로 시간 (업무 시작/종료/휴게 시간)
5. 휴일 및 연차 유급 휴가
위 내용이 하나도 포함 안 된 종이 쪼가리를 내민다면 비즈폼에서 표준 근로계약서 양식 받아서 다시 작성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세요. 한 번 도장 찍으면 거기 쓰여 있는 모든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 도장은 신중하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일 경우에만 찍어야 합니다.
면접 때 물어보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도 이때 물어봐야지, 나중에 할 말 있다고 대표님 불러서 ‘대표님 혹시 퇴직금은 저희 연봉에 포함된 건가요?’ 이렇게 물어보면 찍히기 마련입니다. 파견직으로 계약을 맺었을 때는 계약 갱신 기간과 시급, 근무 시간 보고 절차에 관해 꼼꼼하게 물어보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정사원으로 들어갈 때는 연차/월차, 퇴직금, 휴일 등 워라밸에 관한 것들을 물어보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답변이 돌아온 적은 거의 없었지만, 내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서 일하는 거랑 모르고 일하는 거는 천지 차이입니다.
일을 안 할 때는 미친 듯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싶어 지지만 막상 도장을 찍고 나면 '도비는 자유예요'를 외치고 싶어 지는 게 사람입니다. 야생 동물급 적응력을 자랑하는 저는 한 달을 채 못 채우고 지루함에 빠져 회사 가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일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 계약을 맺으며 사업주에게 노동과 시간과 작업물을 제공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주는 제 피땀눈물의 대가로 돈을 주기로 약속한 거고요. 저는 돈만 주면 새벽에도 잘 일어납니다. 그래서 출근도 잘합니다.
이상하게 아침에 일어나서 씻기 까지는 죽을 만큼 싫다가도 찍고 바르고 낭창낭창하게 차려입고 출근송 틀고 버스 타면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은 듭니다. 출근길에 커피 한 잔 사들고 가면 조금 더 활력이 생깁니다. 회사에 도착하면 의욕이 또 꺾이지만 힘내서 책상에 앉으면 그렇게 하기 싫던 일도 어찌어찌 완성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저는 지배보다는 복종이 타입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