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5화-나이에 관하여
1995년에 태어나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 이십 대 중반의 두 번째 해를 걷고 있습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2020년 현재 1997~8년생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적은 나이도 아닌 거 같습니다.
전 막내가 익숙합니다. 집에서도 거의 막내인 데다가 첫 직장 간사이 공항에서도 동기들 중 나이가 제일 어려서 항상 언니들이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습니다. 알아서 리드해주고 놀아주던 언니 오빠들의 손길에 익숙해져서 솔직히 동생들 대하기가 쑥스럽습니다. 누구는 스물여섯 먹도록 헤매고 있는데 척척 제 몫을 해내는 이십 대 초반 동생들을 보면 더 부끄럽습니다. 제발 저한테 질문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달 전인가, 너무 힘들어서, 노래라도 듣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퇴근 후면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을 보며 500ml짜리 맥주 한 캔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들은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컨셉 기획에서 편곡, 안무 구성까지 알아서 해 오고 무대 위에서는 날아다닙니다. 무대 끝나고 나서는 감격과 허탈함에 젖어 뿌앵하고 우는데 그건 또 귀엽습니다. 갭 차이에 치여서 검색창에 이름을 쳐보니 거진 저보다 동생이랍니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아이돌이 한창 활동하던 나이도 이십 대 초중반이었을 텐데, 괜히 술 마시다가 뼈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95년생 누나는 술 마시면서 울다 웃고 있는데 모니터 속 동생 (혹은 동갑)들은 이름 하나 알리기 위해 이 갈고 온 몸이 바스러지게 무대를 꾸밉니다. 소름 돋게 섹시해서 콧평수가 넓어지다가도 금세 현타가 와 먹던 걸 정리하고 그 날 쓰던 기획안이나 끄적여 봅니다. 진도는 나가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패배감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누구는 작사작곡편곡도 뚝딱하고 팬도 많고 젊고 잘생기기까지 한데, 같은 창작자로서 많이 하찮아집니다.
퇴근 후 술 마시며 아이돌 영상 보는 95년생은 출근하면 90년대 초반생과 Z세대 사이에 끼여 꼰대를 욕하고 가끔은 꼰대 짓을 하는 N포 세대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면 엄청 싫어하다가도 모르는 사이 동생들한테 조언이랍시고 주절거리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제 일에나 집중합니다.
90년생이나 95년생이나 97년생이나 처음 입사하면 호칭은 ‘막내’로 통일됩니다. 일상에서는 그렇게 익숙하던 막내라는 단어가 회사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제가 어제저녁 모니터 속에서 보던 아이돌 그룹의 막내라면 멤버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메인 보컬이나 안무 단장 타이틀 달고 팀을 쥐락펴락하는 실세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겠지요. 회사에서도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어리면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게 답입니다. 막내온탑 같은 거 시전 하다가는 경우 없는 놈으로 찍혀 눈 밖에 나버리는 겁니다. 위에서 까라면 까고 위에서 하기 싫어하는 일을 눈치껏 처리하는 게 막내의 역할입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점심이 맛없어도 조연출 탓, 날씨가 구려도 조연출 탓이랍니다. 그렇습니다. 막내는 동네북입니다.
회사마다, 부서마다, 어떤 사수를 만나는가에 따라 하는 일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집에서도 안 하는 짓을 왜 여기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일들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면지 간 뒤 분쇄기 비우기, 자전거 바퀴 바람 넣기, 회식 장소 알아보기, 촬영 레퍼런스 서치하기, 소품 정리하기... 뭐 이 정도면 무난합니다. 업무 강도도 낮고, 사수 얼굴 안 보면서 한 숨 돌릴 수 있거든요.
업무 시간에는 회의록 작성, 데이터 기록, 아이디어 착즙하기 등 비교적 간단한 일을 맡는데 일하는 느낌도 들고 여기까진 괜찮습니다. 그런데 야근할 때 시켜 먹는 밥 세팅하고 다 먹은 거 치우기나 커피 머신 닦기 등을 지시받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왜 니가 먹은 걸 내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까라면 까는 게 막내이니 역겨운 거 참고 치웁니다. 손 닦고 자리에 앉으면 짐 싸서 집에 가고 싶을 만큼 현타 씨게 옵니다. 아무리 제 좌우명이 ‘수처작주 입처개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내가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자리다.)이라지만 주인 의식 잃는 거 한 순간입니다.
애초에 회사가 가족도 아닌데 ‘막내’라는 워딩을 갖다 붙이는 것도, 그 워딩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도 소름 끼치게 싫습니다. 이래서 가족 같은 회사를 한 글 자씩 떼고 가, 족 같은 회사라고 부르나 봅니다. 채용 공고에 대놓고 'ㅇㅇ팀 막내 뽑습니다'라고 써놓는 곳도 있던데, 그런데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가지 않았습니다.
또 걸러야 될 회사는 채용 공고가 자주 올라오는, 즉 사람이 자주 그만두고 자주 들어오는 곳이지만 내가 그 회사 막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탈출이고 뭐고 한두 달만 버티고 새로운 막내한테 시다바리 잡무를 토스해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일 겁니다. 몇몇 회사에서 그 고된 시간을 악바리처럼 버티다가 후배가 생긴 지 얼마 안 지나 사표를 내버린 건 쫌 아쉽네요.
프로 이직러인 제가 여기서 구르고 저기서 구른 총경력을 합치면 주임쯤 되지만 어딜 가나 항상 중고 막내 취급을 당합니다. 이십 대 초반에는 맥스를 찍던 인내력이 이제는 점점 떨어져서 빻은 소리 들으면 맞받아치다가도 차마 나이 때문에 그만두겠다는 말은 못 합니다.
대신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 휴식을 취합니다. 이전 회사에서 같은 팀이었던 분은 원데이 클래스 킬러로 시간이 날 때마다 무언가를 만들어 왔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분도 있었고 반려 동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분도 있었습니다. 연애도 직장에서 갉아 먹힌 자존감을 채우기에 좋은 방법입니다. 주말에 담뿍 받은 사랑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겁니다. 혼자서 발버둥 치는 것보다는 애인이 '잘한다' '이쁘다' 한 마디 해주는 게 더 힘이 됩니다. 이래서 아무리 바빠도 연애는 하라는 거 같습니다. 글쟁이인 저한테는 쓰고 싶은 글을 필터링 없이 주야장천 쓰는 것도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입니다. 각자의 방법으로 충만한 휴식을 취하다 보면 서러운 시간도 지나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