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

시급 인생 6화-소비에 관하여

by 가람

시급러의 경제관념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 아무 도움 안 되는 민폐 캐릭터 뭉치의 화폐가치는 가장 좋아하는 장어 덮밥입니다. 값비싼 걸 봐도 감상할 줄은 모르고 ‘이거 하나 팔면 장어 덮밥이 몇 그릇’ 이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싫어하는지 알 거 같습니다.


그놈의 장어덮밥


저도 코난을 보다 예고편에 소년 탐정단이 나오면 한숨을 쉬는 사람 중 하나지만, 돈 생각할 때만큼은 뭉치가 됩니다. 뭉치에게 장어덮밥이 세상이 전부라면 시급 인생을 사는 저에게는 제가 받는 돈이 환율이자 경제의 척도입니다. 2년 전, 한 시간에 만 원 정도 벌던 시절 스케줄대로 5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날 장을 보니 영수증에는 2만 얼마가 찍혀 있었습니다. 하루 노동의 절반이 증발해버린 거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엥겔의 법칙


[엥겔지수]
-가계 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따져 가계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
-25% 이하는 소득 최상위, 25∼30%는 상위, 30∼50%는 중위, 50∼70%는 하위, 70% 이상은 극빈층으로 정의된다.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지출 중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커진다는 경제 이론이 있습니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에 못 이겨 패기 있게 백수를 자처했던 때 여유 자금이라곤 한 달치 월급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돈은 모으는 건 평생이고 쓰는 건 한 순간이더군요.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눈뜨고 일어나면 통장 잔고가 줄어 있었습니다. 은행 앱에 찍히는 숫자는 별 거 아닌 거 같으면서도 돌잡이 때 돈부터 잡는 저 같은 속물에겐 큰 의미를 지닙니다.


분명 2개였던 쉼표가 하나로 줄어들고 쉼표 앞 숫자가 두 개에서 하나로 줄어들 때 자존감도 같이 무너지며 사람이 비굴해집니다.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거나 구글플레이스토어에서 구매 대신 대여, HD 대신 SD 버튼을 누르는 그 비참한 기분을 아십니까? 아무튼 사람이 점보다 작아지는 기분입니다.


좌-백수 시절 가계부, 우-백수 탈출 후 가계부. 돈이 생기니 먹고사는 일 말고 다른 것들에도 눈이 돌아갑니다


왼쪽은 백수 시작하던 달의 가계부, 오른쪽은 백수 탈출 후의 가계부입니다. 총지출 비용은 지우고 올리지만 한눈에 봐도 생활이 다채로워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먹을 거 관련된 아이콘을 찾아서 더해보면 4월이 딱 50%, 9월이 22%네요. 신기하게도 엥겔의 법칙에 꼭 맞아떨어지는 수치입니다. 먹고 살 걱정뿐이던 때는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배 채우기에 바빴는데, 여유 조금 생겼다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적금도 붓고 남 선물 챙길 정신이 생깁니다.






분노와 지출은 정비례

[시발비용]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 순화해서 ‘홧김비용’이라고 부른다.

백수 시절보다는 생활이 여유로워진 건 맞지만 시급 인생을 살고 있는 전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월말에 빠져나갈 통신비와 보험료, 카드 값을 생각하면 돈을 마음껏 펑펑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매일 출근을 하다 보면 스타킹이라든지 커피라든지 필기구라든지 돈 나가는 데가 늘어나 돈도 마음대로 아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시급러의 소비 습관은 별 거 없습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에 웬만하면 일시불로 긁고 다니며 최대한 자유의 몸이 되고자 합니다. 할부로 긁은 거는 아이폰 11 pro와 노트북이 있는데 각각 16번, 11번 남았습니다.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개미처럼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고 싶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주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힘들게 일하면서 사고 싶은 거 하나 마음대로 못 사는 현실이 억울해서 미치고 팔딱 뛰겠습니다. 만원 버스 안에 낑겨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불쌍해서 소비 습관을 조금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이전에는 최대한 아끼기 위해 명품도 사지 않고 인터넷으로 뭔가를 주문할 때면 최저가로 정렬한 뒤 맨 위에 뜨는 걸 샀지만 밖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안쓰러운 저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자고 결정했습니다. 내가 나를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겨줘야 남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거 아닙니까.


이렇게 마음먹은 뒤로는 분노가 차오르면 장바구니에 들어가 슬쩍 결제 버튼을 누릅니다. 그리고 퇴근길에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택배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랩니다. 매일 저녁 들르는 편의점에서도 제일 싼 맥주가 아닌 맛난 수입 맥주에 거침없이 손을 뻗고 주말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배달비 생각하지 않고 시켜 먹고 피곤하면 택시를 탑니다. 물론 적금 부을 돈과 월말에 나갈 돈을 계산하고 움직이는 거지만 시발비용이 퍽퍽한 삶에 내리는 단비가 되어주어 자존감도 자라납니다.


포케가 너무 먹고 싶어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며 먹었습니다. 배달료가 7000원이지만 월급날 다음 날이라 질렀습니다.


화장품이라곤 로드샵 밖에 모르던 제가 스물네 살 생일에 4만 원이 넘는 입생로랑 틴트를 구입했습니다. 내 돈 주고 내가 산 첫 명품이자 시발비용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겨울 쿨톤인 저에게는 10호가 찰떡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누군가가 탄생석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운이 올라간다고 해서 반지를 질렀습니다 검지에는 52호, 중지에는 50호가 딱이라 같이 끼려고 다른 디자인으로 2개 구입했습니다. 비록 남들이 볼 때는 아등바등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저는 제게 어울리는 브랜드 별 호수를 탐구하며 슬기롭게 자존감과 통장 잔고를 지키고 있습니다.


판도라 반지






하늘에서 돈이 내린다면

이미지 출처: KTOON 현이씨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


시급 인생을 탈출하고 새로운 인생의 막이 올라가고 나면 더 어려운 고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고민을 다스리기 위해 더 큰돈이 나갈 거란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한 달 생활비를 계산하며 돈 걱정을 하고 앉아 있겠지요. 그래서 전 하늘에서 돈뭉치나 잔뜩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돈 걱정만 없다면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 비위를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되고, 사소한 일에 비굴해지지 않아도 됩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지만 돈이 있으면 여유로워지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지만 월급쟁이가 무슨 수로 떼돈을 벌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추석에 처음으로 로또를 샀습니다. 번호 딱 하나 맞추고 천 원 날린 꼴이 됐지만 잠시 행복한 상상에 젖어 있던 걸로 만족합니다.


잠수 타긴 글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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