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시급 인생 7화-야근에 대하여

by 가람

야근하는 당신에게


무기력함을 탈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규칙적인 수면과 식사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론대로라면 아침 6시쯤 일어나 9시까지 회사로 향하고 저녁 6시쯤 다시 집으로 향하는 직장인은 무기력함, 우울증과 거리가 멀어야 정상인데 많은 이들이 번아웃 증후군(업무에 시달리다가 소진되거나 탈진했다는 기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인 스트레스, 피어 프레셔, 업무 부적응 등 직장인이 번아웃에 빠지는 셀 수 없는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야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충을 안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인간을 가장 지치게 만든 것은 야근과 과도한 업무량입니다. 잠을 못 자면 가만히 있어도 몸에서 젖산이 분비되는 느낌이 들어 감각은 예민해지고 생각은 둔해지기 마련입니다.


직장인 번아웃 극복에 관한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나루시마 이즈루, 2017) 뻔하지만 힘들 때 보면 오열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어떤 근로기준법을 뒤져봐도 사람을 늦게까지 회사에 묶어 둬도 된다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중인 2020년 오늘날, 사업주는 법정근로시간 40시간 말고도 12시간 초과 근무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임금으로 지불해야만 합니다. 가끔가다가 우리네 회사는 그런 법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치는 곳이 있는데, 대한민국 노동법은 근로한 만큼, 최저임금 이상의 돈을 노동자가 받도록 되어있습니다. 사업장 규모나 사규에 따라서 더 큰 혜택이 붙느냐 마느냐의 차이지, 일한 만큼 최소한의 대가를 보상받는 것이 우리 노동자의 권리입니다.

불금에 저녁 시키는 거 실화?


예술가를 향한 이상한 동경이 있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왕왕 책상 앞에 앉아 끄적거리곤 합니다. 꼭 좋은 글이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내면의 씨앗을 뚠뚠하게 불려 나가는 혼자만의 충만한 시간이 좋아 자발적 자택 야근 타임을 갖습니다. 그래서 전 야근 많음과 야근 수당 없음이 관례로 굳어진 광고 업계에 발을 들여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에 입사해 한국에서의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면접을 보고 나서 며칠 뒤, 전화로 합격 사실을 알리던 이사님은 “야근이 굉장히 많고 수당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장 어디라도 안 나가면 글이고 나발이고 노량진으로 쫓겨날 판인데 따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하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2019년 12월 2일이 입사일이었는데, 팁을 하나 드리자면 광고 대행사는 연말연시에 입사하는 게 아닙니다. 비딩이 몰려서 굉장히 바쁘거든요. 신입도 10시 12시까지 남아 아무튼 팀에 도움이 될 일이 없나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집에 갑니다. 웬만한 광고 대행사는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꾸준히 채용 공고가 올라옵니다. 그러니까 당장 갚아야 할 돈이 있는 게 아니면 연말연시에는 쫌 참았다가 날이 풀릴 때쯤 지원해도 늦지 않습니다.


밤 12시가 넘어갈 때쯤이면 간식이 나옵니다. 이거 먹으면서 해명 문자 보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정시 퇴근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6시 반이 퇴근 시간이었는데 8시쯤 끝나면 야근이 아니라 잔업 조금 하다가 홀가분하게 집에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늦게까지 남아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그때 당시 사귀던 사람이 12시까지 연락이 없는 제게 전화해 “너 정말 회사 맞아?”라고 물었겠습까. 누구는 콘택트렌즈 빠져가면서 모니터 들여다보고 있는데 억울해서 미치고 팔딱 뛰는 줄 알았습니다.






운영 중인 기업 SNS 채널에 올라갈 콘텐츠를 기획하고 컨펌받고 업로드하고 보고서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광고주님들은 자꾸 뭔가를 더 하려고 합니다. 이를 테면 바이럴 영상이라든지 채용 설명회 콘텐츠 같은 것들요. 그럼 우린 또 하던 일 다 끝내고 저녁 7시부터 회의에 들어갑니다. 거기다 새로운 광고주님 뚫느라 비딩 들어가는 기간은 나 죽었다고 생각하고 출근하면 됩니다. 어느 날인가 야식으로 오징어 다리 뜯으며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는 모습을 보고는 퇴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구 애인 강아지가 보고싶듯이 전 회사 생각은 안나면서 야근할 때 먹었던 것들은 가끔 생각납니다.


다들 내 일 아니렷다 남 몰라라 하는 태도도 야근이 늘어나는 고질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애초에 인력 분배만 잘해서 짜임새 있게 팀을 운영해 나갔으면 일을 질질 끌지 않아도 되는데, 업무 공유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누구는 쌔빠지게 일만 하고, 누구는 시간만 때우다 보니 일이 잘 굴러갈 리가 없죠. 한편으로는 최저임금보다도 못한 연봉받으면서 저녁까지 바치라는 어처구니없는 경영 마인드에 반항하는 사원들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ㄴr는 가끔 새벽에 취한다…☆


첫 회사에서 한 달의 절반을 야근을 했다면 간사이 공항에서는 한 달의 절반을 새벽 근무를 서야 했습니다. 24시간 돌아가는 공항인지라 당시 계약서를 살펴보면 근무 시간은 ‘오전 4시에서 오전 3시 59분 사이로 정해진 시프트에 따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 50분까지 출근할 때도 있었고 저녁 7시에 와서 11시에 집에 갈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오전 9시까지 출근하던 사람보고 갑자기 새벽에 출근하라고 하면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습니다. 그럴 때면 술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을 깐 뒤 자명종을 새벽 1시에 맞춰놓고 선잠을 잡니다. 그 시간에 출근하려면 회사 셔틀버스를 타야 하므로 1분이라도 늦잠 자면 주옥 되는 겁니다. 남들 잘 시간에 우당탕탕 출근을 해낸 뒤에는 탈의실에서 옹알이를 하면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몽롱한 정신을 플라이트 레이더와 무전으로 깨웁니다. 출근할 때는 욕지거리를 달고 나가도 오전 11시쯤 근무 끝나고 나와 맥모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 몰려옵니다.


일 끝나고 먹는 맥모닝 최고. 노동의 맛


제일 싫어하는 XJ시프트 (오후 4시에서 익일 오전 1시 근무)가 몰려 있는 주간에도 술의 힘을 빌렸습니다. 마지막 비행기가 무사히 간사이 공항 관제탑과 빠빠이 무전을 주고받은 걸 확인하면 밤 비행기가 있는 홍콩 항공 여객부 언니 오빠들과 술을 마십니다. 새벽 2시쯤 들어가 술집 문 닫을 때까지 깔깔거리다가 집으로 와 오후 1시까지 잔 뒤 다시 회사로 향합니다.


아지트였던 토리키. 시작은 항상 매콤 오이와 생맥 300cc






그래도 시프트에 따라 일하면서 좋았던 점은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명확했다는 것입니다. ‘시프트=각자의 임무’이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되면 내 다음에 근무할 사람에게 인수인계해주고 수고하셨습니다 한 마디 하면 끝입니다. 절대 일찍 퇴근한다고 눈치 보거나, 칼퇴근한다고 욕먹을 일이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각자 주어진 시간표에 따라 노동을 제공했으니까요.


또, 지금은 잔업의 ‘잔’ 자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지만 간사이 공항에서 근무했을 적에는 내심 잔업을 시켜 주길 바랬습니다. 월급을 받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잔업을 하면 무조건 돈을 더 받을 수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회사 측은 잔업을 잘 안 시키려고 하고 잔업을 하려면 슈퍼바이저 (SPVR; 사무직으로 치면 팀장)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돈이 제일 좋은 저는 마지막 담당 항공편이 딜레이 되면 ‘ooo 편 딜레이 처리’ ‘ooo 편 서류 작업’등을 이유로 쫌쫌따리 잔업 수당을 챙겨갔습니다. 새벽 근무나 12시간씩 일하는 시프트도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심야수당, 초과수당 나올 건 다 나와서 월급이 생각보다 올라가니까요. 예상보다 금액이 반올림돼서 올라가면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사라져야 할 단어, 과로사


광고 업계에 발을 들이려고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던 대학 4학년 때, 일본 대형 광고 회사에서 근무하던 직원 한 분이 과도한 업무와 야근에 못 이겨 삶을 마감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벌써 3~4년 전 이야기지만 필요 이상의 야근과 업무 부담은 고질병처럼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이전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이유도, 주변 사람들이 안정과 지위를 포기하게 된 이유 모두 야근 때문이었습니다. 잠만 푹 자면 정신이 들어 ‘내가 왜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그 생활로 돌아가라고 하면 못 할 거 같습니다.


이전 회사에서 야근이 끝나고 카카오 택시를 부르면 세 번에 한 번은 같은 기사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저녁 늦게 얼빠진 표정으로 학동역 1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저를 알아보신 기사님은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고 저는 쪽팔린 줄도 모르고 펑펑 울면서 내렸습니다. 그 기사님 바람대로 다시는 못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힐링 택시


우리네 노동자는 사업주와 계약을 맺을 때 소정근로시간을 약속합니다. 월급쟁이라면 보통 월요일에서 금요일, 하루 8시간씩 주 40시간이 되겠고, 시급을 받는 파트타이머나 전문직 종사자라면 시프트에 따른 시간이 되겠죠.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실수 없이 시킨 거 열심히, 잘하면 됩니다. 실수하면 혼나고 뒤처리하면 되고요. 그러니까 제발 칼퇴근이라는 이상한 단어 따위 쓰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문화가 정착되길 오늘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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