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포 세대의 마지막 포기는 포기이길

시급 인생 9화-포기에 관하여

by 가람

프리타, 집을 사다?


한창 일본 문화에 빠져 있던 중학생 시절, <프리타, 집을 사다>라는 동명 소설 원작의 드라마를 보고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주인공 ‘세이지’는 꼰대 상사 하나 때문에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몇 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나옵니다. 이십 대 후반이 다 되어가도록 집에서 게임만 하다가 눈치가 보이니 회사 이름만 바꿔서 이력서를 뿌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왜 저러고 살까 욕을 한 바가지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저런 역할을 연기한다는 사실도 화가 났습니다.


백수 연기 참 잘하는 니노미야 카즈나리. 실제로는 돈 많은 집돌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웬만한 가족 드라마가 해피 엔딩이듯 세이지는 갱생에 성공합니다. 프리터 (フリーター; 영어 ‘프리 (free)’와 ‘아르바이터 (arbeiter)’를 합성한 일본의 신조어. 평생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생활로 근근이 벌어먹고 살다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땀 흘려 노동해 돈을 모아 내 집 장만에 성공하죠. 직장에서 만난 멋진 상사와 연애도 시작합니다. 애인의 밥 먹었냐는 안부 인사에 멋쩍게 ‘아침, 점심, 저녁?’이라고 되물으며 드리워진 먹구름을 하나씩 지워나갑니다.






<프리타, 집을 사다> OST <果てない空> (끝없는 하늘) 가사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果てない空がそこにあるって今確かな声が聞こえる
飛べない自分を変えていこうか踏み出して何度でも
やり直そう力強く

끝없는 하늘이 거기 있다고 지금 확실한 목소리가 들려
날 수 없는 나를 바꿔볼까 몇 번이고 발을 내디뎌
힘차게 다시 시작하자


희망 가득 찬 드라마를 보고 자란 중학생은 이십 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세이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세이지보다는 잘 살겠지’ 다짐했던 건 세이지에게서 제 미래를 보고 두려워서였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의 다짐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반대로 실현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집 장만을 하기에는 서울 집값은 하늘을 찌르고 통장 잔고는 땅을 칩니다. 밥 뭐 먹었냐고 다정하게 물어봐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된 게 꼭 내 탓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세상 탓을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남 탓만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조용히 있어야겠습니다.


전쟁통에도 사랑이 싹트고 웃음꽃이 피어났듯이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도 일말의 인류애라는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낭만주의자이지만 제 이상은 또다시 현실의 벽 앞에서 꺾이고 맙니다. 힘들어도 원하는 일을 하고 바빠도 연애를 하며 서로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은 욕심인가 봅니다.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홀로 긴긴 터널을 걸어 나와 최고로 행복한 순간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는 요즘 사람들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힘들면 포기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나 봅니다.






서울의 밤하늘은 언제나 최고 농도의 흐림


3포 세대: 연애, 결혼, 출산 포기
5포 세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포기
7포 세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포기
N포 세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α 포기


그렇습니다. 이제는 N포 세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하늘은 온 데 간데없고 미세 먼지 가득한 뿌연 하늘만 남아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에서 시작된 포기의 개수는 시대의 압박에 못 이겨 한 두 가지씩 늘어나더니 기어코 셀 수 없는 포기를 강요당하는 N포 세대의 탄생에 이르렀습니다. 시장에 가면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꿈 많고 열정 많던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 본인이 뭘 놓치고 살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기분 나쁜 새벽 공기와 미세 먼지가 한 데 섞인 하늘


어른이 되면 내 집 장만을 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겠노라 떵떵거리던 저만 해도 캥거루 족(성인이 되어 어느 정도 나이가 차 경제적으로 독립해 나갈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나 형제자매의 경제능력에만 의지하는 이들)이 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듭니다.


얼마 전 회사 사람들과 노후 자금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60살에 은퇴해 80살까지 산다고 했을 때 5억 가까이 필요하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습니다. 관절 잘 돌아가게 기름칠해서 죽을 때까지 일하는 쪽이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라도 저축을 더 늘여볼까 했지만 그러면 점심에 삼각 김밥만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째 백수일 때 보다 돈에 더 쪼들려 사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대도시의 모습과 달리 '미카'와 '신지'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반짝거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2010년도에만 해도 청춘의 모습을 희망적으로 그리던 미디어도 이제는 일말의 끈을 놓아버리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발표된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이시이 유야, 2017) 속에는 도쿄에서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N포 세대 청춘이 등장합니다. <프리타, 집을 사다>나 이 영화나 남자 주인공이 공사판에서 일한다는 설정을 같지만 영화에서는 그 어떤 따뜻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롭고 불안해 서로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만 자기 자신 하나 제대로 보듬을 여력이 없어 번번이 실패하고 상처 받기를 반복합니다.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상처 받을 걸 알면서도 한 발짝 다가가고 또다시 상처 받는 짓을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요? 언제가 되어야 소중한 걸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렵게 서로에게 닿은 만큼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포기를 포기할 줄 아는 날이 온다면


제 꿈은 작가입니다. 물론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일도 합니다. 아침 6시에 눈을 떠 사무실로 향해 색 바랜 분홍 파티션 속에 파묻혀 광고 컨셉을 발굴하고 거기에 맞는 글을 써냅니다. 어떤 날에는 새벽부터 방배에 번쩍 파주에 번쩍 밥 한 술 못 뜨고 성남에 번쩍, 그러곤 수고했다는 진정 어린 말 한마디도 못 듣고 끙끙 앓으며 집으로 향합니다. 일을 하며 보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보람보다 짜증이 차오를 때가 더 많습니다. 쉬는 날에는 업무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툴을 익히고 짬을 내 원고를 쓰고 좋은 글을 공유하고 필사를 합니다.


인간다운 대접과 안정적인 벌이와 둥글둥글한 성격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런 매일매일을 살아야 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이 녹아든 글이 내 삶의 전부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건데 부정당할 때면 끝도 없는 나락에 빠집니다. 그리곤 또 자기 힘으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먼지를 털고 걸어 나갑니다.


N포 세대가 포기해야 할 것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순서는 상관없으니 부디 포기를 포기해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 나갈 힘을 서로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걱정 없이 많이 만나고 많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이야기 하는 게 최고의 위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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