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다이 시라소니처럼 살아남기

시급 인생 10화-경력이란

by 가람

작심삼개월 프로 퇴사러


커리어 커리어 거리는데 솔직히 진지하게 커리어 생각하면서 살 만큼 매일매일이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저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눈뜬 김에 씻고 씻은 김에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설 뿐입니다. 알람도 감미로운 걸로 해 놓으면 듣다가 다시 잠들어버린답니다. 다음 주부터는 잠이 확 깨는 숭한 노래로 설정해놔야겠습니다.


등 떠밀려 취업 준비를 시작한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외딴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1일 인턴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방송국이나 대형 광고 회사에서 인턴을 하는 걸 보고 부러워서 ‘기획’이라는 글자만 보이면 마구잡이로 지원한 건데 정말 아무 곳에 당첨되었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근처 돈까스 집에서 인사담당자분과 식사를 하는데 그분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3년은 버틸 수 있는 곳을 첫 직장으로 잡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 3년쯤 거뜬히 버티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야 3년이 지나면 졸업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지만 직장인은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때운다고 해서 새로운 시작이 찾아 오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나의 힘으로 내 갈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퇴사 욕구가 뒤끓는 시기가 찾아오지만 제겐 그 고비가 너무나도 이릅니다. 웬걸, 입사하는 족족 3개월마다 고비가 찾아와 주기적으로 백일기도라도 올려야 할 판입니다. 다음 여정을 떠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경력과 자금이 필요하니까 힘들어도 난 내 일을 사랑한다고 자기 암시를 걸면서 매일매일을 버티고 있는 거구요.


알럽마좝알럽마좝알럽마좝







모 아니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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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직장을 들어가든지 적어도 1년은 버티라고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초년생들은 커리어를 쌓기 위해 그 시간을 깡으로 버텨냅니다. 아니다 싶은 곳에선 빨리 도망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으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게 이직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속해 있는 직장에서 빨아먹을 게 있다면 버티는 게 맞지만 인격 모독을 당해 자존감이 바스러진다거나 그곳에서의 시간이 물경력이 될 거 같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정답입니다. 모 아니면 도라고, 일주일 다녀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오거나 버티기로 마음먹었으면 1년은 버티는 게 현실적인 을의 태도 아닐까요.


직장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에는 분명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모여 한 달,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면 ‘경력 N년차’라는 감투를 걸칠 수 있게 됩니다. 직장을 다니다 보면 분명 위기는 찾아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지고 먼저 떠나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길 반복하다 보면 허탈한 기분도 듭니다. 그럴 때면 커리어니 나발이니 모두 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따르고 싶은 선배와 이끌어주고 싶은 후배를 만나 멋진 커리어를 쌓겠다는 로망 같은 거 쫓기 벅차다면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절실한 이유를 만드세요. 할부금을 다 갚아갈 때쯤 다시 12개월 할부를 긁거나 나를 위해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현실에 치여 사는 경험은 헛된 게 아닙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더 단단해져 있을 거고 로망도 더 가까워져 있을 겁니다.






경력을 쌓는 행위의 본질은 같아도 방법은 업직종마다 다릅니다. 광고 업계 종사자인 저에게 경력이란 포트폴리오입니다. 근무 기간이 길더라도 마땅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면 물경력이 되는 거죠. 반대로 근무 기간이 짧아도 포트폴리오 짱짱하게 만들었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근무 기간과 인사이트는 절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어떻게든 내 포트폴리오 맨 첫 장에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들려고 애를 쓴다”는 스타일리스 한혜연 님의 말을 되뇌며 글을 씁니다. (뒷광고 논란은 있어도 전 이 말이 참 좋습니다) 한 문장을 탄생시키려면 정말 많이 읽고 보고 느껴야 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쉼표 하나를 두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싸우고 타협하고 웃으며 그렇게 글을 씁니다.


포트폴리오 정리는 주기적으로 해줘야 나중에 고생 안 합니다


반대로 근무 기간은 긴데 포트폴리오가 마땅치 않다고 해서 완전히 실패한 경력도 아닙니다. 긴 시간 근무하면서 얻은 인사이트와 인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새긴 참을 인(忍) 자는 나이테가 되어 어떻게든 빛을 발휘합니다. 그걸 짬밥이라고 하는데, 툴도 한 번 더 만져본 사람이 더 빠르고 아이디어도 하나라도 더 많이 본 사람이 번뜩합니다. 어쨌든 결론은 경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다음 직장을 찾아갈 때 몸값도 불리고 개길 구석도 생기는 거죠.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브라 풀고 포커치던 그 멤버 맞습니다


광고 업계에서 일하겠다는 꿈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언 2년째 되던 11월의 어느 날, 간사이 공항에서 함께 산전수전 겪었던 언니들을 만났습니다. 언니들은 그나마 제가 전공 살려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해줬지만 마음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이젠 제멋대로 때려칠 나이도 지났습니다. 언니들이 힘들어도 참고 버틴 이유는 1년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년이라는 시간을 무사히 버텨낸 정신력과 깡을 짬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제가 그때 그 언니들 나이가 되어보니 뭣 같아도 함부로 그만두지 못하던 그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언니들 참 대단합니다.






나를 웃게 만드는 게 누군가의 칭찬 한 마디듯이 내게 생채기를 내는 것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없는 말이 있는데 가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배때기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말을 들을 때면 어처구니가 없어 표정 관리가 안됩니다. 짤릴 걱정 없이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노량진으로 가 공무원 준비하라는 주변의 말에 혹하는 걸 보니 참 많이도 당하고 다녔나 봅니다.


취업의 문턱에서 100번의 고배를 마시던 시절로 돌아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장해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던 시절을 지나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광고 회사에 취직해 글도 쓰면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매일 되새기던 제가 정말 그러고 살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2년 전과는 또 다른 아픔이 도사리고 있지만 어찌 됐든 ‘행복하게’만 빼면 꿈의 절반은 이룬 것입니다. 꿈의 나머지 절반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는 앞으로 제가 살아가면서 풀어야 할 숙제가 되겠지요.


얼마 전 넷플릭스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정주행을 끝냈습니다. 고개 숙이고 있던 제 맘에 빠꾸 없이 들어온 촌므파탈 황용식이의 대사는 참말로 시의적절하게 따뜻해서 몰래 울어버렸습니다. 그리곤 다시 글을 씁니다. 황용식이 처럼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글을 쓰는 것이야 말로 제게 있어 최고의 자랑이자 경력이 되어줄 테니까요. 좋은 글을 쓰겠다는 심지 하나로 앞으로도 독고다이 시라소니처럼 살아가렵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KBS, 2019) 마지막 인사말. 겨울에도 꽃은 핀답니다. HB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