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인분만 일합시다

시급 인생 11화-직무란

by 가람

나는야 냐냐냔 (냉혈한)


여러분 MBTI 테스트해보셨습니까? 저는 INTJ, 용의주도한 전략가로 세상에 3%밖에 없는 희귀한 종족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해보는 거지만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설명 덕분에 가끔 진짜 과학적 증거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놀랍니다.


질투 날 것 까지야.. 이미지 출처: 네이버 웹툰 <2020 최애캐의 MBTI>


INTJ들은 용의주도한 전략가라는 별칭에 딱 맞게 차가울 만큼 객관적이고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걸 극도로 꺼려합니다. 일이나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존감이 강하며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예민한 성깔을 지닙니다. 덕분에 일 하나 맡기면 기깔나게 잘 해냅니다. 처음부터 잘해서 넘기면 받는 사람도 습관이 돼서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되는데, INTJ들은 무식한 데가 있어서 대충대충이 어렵습니다. INTJ는 개인주의 성향도 강해서 살갑게 사람들을 맞는 게 웬만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는 힘이 듭니다.


성향이 이런지라 그냥 혼자 노래 들으면서 일하는 게 좋습니다. 누군들 피곤하게 일일이 남의 감정 맞춰가며 일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월급 받는 노동자 신세란 내 성향에 반하는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특히나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가 발달된 한국에서는 사회적 얼굴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게 정신 건강에 편합니다. 옛날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그렇게 토할 것 같이 힘들었지만 요즘엔 낯짝이 두꺼워졌는지 아무 사람이랑 별 얘기를 다합니다. 물어보기 싫어도 먼저 물어보고 나서기 싫어도 먼저 나서서 챙길 것도 챙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낯짝 두꺼운 INTJ와 함께 일한다는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일단 맡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 기한까지 만족할 만한 퀄리티로 갖다 바칩니다. 일은 하기 싫어 죽겠지만 그렇다고 내 실력과 프라이드가 의심받는 건 더 싫어서 썩은 표정을 하고 키보드를 두들깁니다. 하지만 극도로 개인적이고 계산적이라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답니다.

간사이 공항에서 근무하던 시절, 저는 손님을 직접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비스 정신을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딜레이 된다고 하면 신경질 내면서 전화 돌리고 비행기 출발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팩스 안 보내주는 카고한테 화 내고, 성질 드륵드륵 내면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뭐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행기 정시 출발했고, 로드 시트 (load sheet)에 문제없고, 승객 수랑 가방 수 다 일치하고, 서류도 빠짐없이 철했습니다. 그럼 된 겁니다.


당시 쓰던 일기만 봐도 얼마나 분노가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여객 부서에서 일하던 동료들은 일잘러의 센스에 품격 있는 서비스 마인드까지 강요받았습니다. 슈퍼바이저 별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 달랐는데 누구는 서비스 마인드를 중요시했고 누구는 일머리만 있으면 오케이였습니다. 공항 지상직이란게 서비스직인지라 어느 쪽이 무조건 맞다고 하기도, 틀리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란 더 어렵습니다. 오늘 어떤 수퍼바이저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많은 손님을 제시간에 체크인하고 L1을 제때 닫아도 말투가 상냥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일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당신이 서비스직이나 영업직이 아니라면 굳이 완벽한 서비스 마인드를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친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인격까지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이상한 소리 지껄이는 사람에겐 매가 약입니다.






일당백 같은 소리 하네


[직무기술서]
직무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하여 직무의 성격, 요구되는 개인의 자질 등 중요한 사항을 기록한 문서.
직무번호, 직무명, 소속, 직군, 직종, 등급, 직무개요, 수행요건(일반요건, 소요능력)이 기재돼야 한다.


직장인에게는 Job Descriptions (직무기술서)라는 게 있어서, 거기에 적힌 업무 내용에 준하는 것만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갑질입니다. 갑질에는 을질로 을은 을답게 할 것만 딱 하고 집에 갑시다. 신입이라면 회의 자료 복사나 폴더 정리 정도는 할 수 있지만 당신의 상사가 취해서는 집에 데려 달라고 하거나, 본인이 쓴 종이를 분쇄기에 넣어 버리라고 하거나, 자식 생일 선물 좀 고르려 같이 가자고 한다면 딱 잘라 거절하세요. 그 사람이 우리 점수 매기는 사람이라 가만히 있는 게 답이라고요? 나 하나 참는 걸로 끝이 아니라 당신의 침묵 덕분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습니다. 부당한 일에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한 사회 스킬입니다.


"유미씨, 저 자식이 PD가 아니라 국장, 사장이라도 유미씨가 피해자야. 피해자가 왜 저런 놈한테 사과를 해?" 이미지 출처: <18 어게인> EP.13 (JTBC, 2020)

우리 직무기술서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해야 한다거나 무조건 집단주의에 따라야 한다거나 사적인 부탁에 응해야 한다는 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제 직무는 카피라이팅입니다. 그러면 광고 컨셉 개발하고 기획해서 거기에 맞는 글을 써서 내면 되는 겁니다. 팀원들,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예의 지키고 적당히 웃고 떠들고 하는 건 필요하지만 그 정도는 사회인이라면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약속한 시간만 딱! 약속한 일만 딱! 알바는 딱 알바답게! 출처: 2019 알바천국 TVC


그러니까 기본만 딱 잘합시다. 중간중간 시키지 않아도 상황을 서로 보고하고, 일이 났으면 빨리 연락을 하고, 고민이 있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상사, 동료에게 상담합시다. (일본에서는 보고-연락-상담의 앞 글자만 따 사회인의 기본을 ‘시금치 (호우렌소우)’라고 부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제 몫은 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백 사람 몫을 해냅니까. 돈을 백 인분 준다고 하면 생각해볼만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죠. 그러니 직무기술서에 쓰여 있는 각자의 직무에 충실한 직장 생활을 즐깁시다.



내 가치는 내가 만듭니다


취업이 너무 안 돼 눈을 낮추고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춰 들어간 곳이 간사이 공항이었습니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토익이 900을 넘지 않아도, 대회 수상 자격이 없어도 근무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자존감이 낮아진 저는 그곳에서라도 인정받으려고 빌빌 기고 다녔습니다. 제복을 입고 일해서 그런지 군기까지 바짝 들어 머리 좀 묶으라는 선배 말에도 무조건 잘 못 했다고 하고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일이 잘 못 돌아가면 사과부터 했습니다.


결국엔 제가 저를 호구로 만든 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전 언제나 빌빌 기어야 하는 후배가 돼 있었습니다. 제가 퇴사하던 날 절 그렇게나 무시하던 선배는 웃으며 선물을 건넸습니다. 끝까지 사람을 멕이던 그 낯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조금만 더 낯짝이 두껍고 덜 기었더라면 다른 사람들도 절 함부로 대하진 못했겠죠. 그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근무하며 지금 생각하면 한 판 붙고 싶은 일들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다행인 건 과거의 상처가 아물고 굳은살이 박여 웬만한 말에는 꿈뻑도 하지 않는 지금의 뻔뻔한 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앞으로 더 뻔뻔해져야겠습니다.


나다움은 몇 개씩 있어도 좋으니까요. 이미지 출처: 유튜브 a:magazine 2020년 8월-1 일본광고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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