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12화-오해에 관하여
출근하면 일단 노래부터 틉니다. 1900원짜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후후 불면서 그 날 할 일을 정리하고 화장실 한 번 갔다 옵니다. 아침부터 아주 딴짓의 향연입니다. 본격적으로 파워포인트를 연 뒤 업무에 들어가도 일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겠을 때가 많습니다. 광고 일이라는 게 일단 뭐라도 본 게 있어야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일인지라 집 나간 영감님 돌아오라고 괜히 이것저것 뒤져봅니다. 이전에 만들었던 자료를 꺼내 볼 때도 있고, 현아 플라워 샤워 뮤직비디오만 10번 넘게 본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생각이 안 떠오르면 의자를 뒤로 빼 동료들과 담소를 나눕니다. 희한하게 하는 얘기는 업무랑 상관없는데 일단 얘기를 하면 아이디어가 막 떠오릅니다.
우리 일이란 게 하루 종일 쌔빠지게 타이핑을 해야 한다든지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녀야 한다든지 그런 노가다가 아닙니다. 그저 뭐 싸듯이 싸질러 놓은 뭉뚝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더 뾰족하게 만들까 고민하는 미세한 조정의 연속입니다. 미세한 조정의 예를 들어보자면 같은 폰트라도 60g을 쓸까 80g을 쓸까 Alt-H-FF를 수도 없이 눌러보는 일이나, 스틸이 들어가는 쌈박한 카피가 없을까 ‘스틸이 들어가는 단어’를 구글링 하는 일이나, 어떤 뷰티 유튜버를 써야 광고주가 좋아할까 유튜브에 들어가 뷰티 영상만 주야장천 보는 일이나, 이미지 톤을 어떻게 할까 온도 탭을 하염없이 스크롤하는 일, 그리고 이번 달 컨셉에 어울리는 레퍼런스를 찾아 핀터레스트에서 무드 컷을 사냥하는 일, 요정도랄까요?
가끔 업무 중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지금 뭐 하냐고 물어보면 분명 업무 중인데도 대답하기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어… 나 지금 ‘푸짐하다’ 유의어만 계속 찾고 있어’라든지 ‘어… 나 지금 인스타그램 들어가서 화장품이 무디하게 찍힌 컷 찾고 있어’라고 말하면 다들 한결같이 ‘월급 루팡하는 배부른 자식’이라고 덕담을 해줍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건 남들이 볼 땐 쓰잘데기 없는 짓 같아도 다 업무와 연관이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단어 하나하나 신경 안 쓰고 막 쓴 카피와 한 글자 한 글자 사전을 뒤져가며 적재적소의 말만 골라 쓴 카피는 그 느낌이 천지 차이입니다. 비주얼 요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간에 얼마나 신경을 썼느냐, 폰트 굵기에 얼마나 고민을 기울였는가의 차이가 그저 그런 광고와 기억에 남는 광고의 차이를 만듭니다. 그래서 곁에서 볼 땐 이 xx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도 결과를 보면 딱 압니다. ‘아. 얘가 허튼짓 한 건 아니구나.’라고요. 오늘도 전 눈에 거슬리지 않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며 받는 오해를 감수하고 일을 합니다.
어엿한 직장인입니다
옛날에는 지금 받는 오해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더 심한 오해를 받은 적도 많습니다. 파견직이라도 직장은 직장인데 사람들은 ‘가람이 언제 취직할래?’라고 자꾸 물어봤습니다. ‘일은 나가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뭐 이런 겁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지금 일 나가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아이 그래도 제대로 된 데 가야지. 알아보고는 있어?’ 또 물어옵니다. 어이쿠 혈압이야. 물론 저도 공항을 평생직장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지만 양말 축축하게 적셔가면서 일하는 사람한테 일 안 하냐고 물어보면 참 억울합니다.
그런 와중에 24시간 돌아가는 회사에서 시프트제로 일하는 탓에 생긴 오해도 많았습니다. 아침 비행기나 마지막 비행기를 날려야 하는 시프트면 남들 다 자는 새벽에 출퇴근을 해야 했습니다. 워낙 꾸미는 걸 좋아하는 전 시퍼런 유니폼에 안전화를 신고 일 해야 하는 게 너무 싫어서 출퇴근할 때만큼은 화려하게 하고 다녔습니다. 풀메이크업에 짧은 치마, 7cm 힐을 즐겨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술 취한 아저씨나 음침하게 생긴 양아치가 같이 술 먹자고 들러붙습니다. 짜증이 나서 ‘지금 일하러 가야 돼서…’ 뿌리치면 ‘어차피 술집으로 출근하는 거 같이 먹자’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런 쓰레기 때문에 호신 용품을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새벽 2시에 화장 찐하게 하고 출근한다고 해서 다 호스티스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음 합니다. 세상에는 니들이 모르는 곳에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24시간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제발 머리통에 넣어뒀음 합니다.
시프트제로 일하면 또 주말이나 공휴일의 개념이 사라집니다. 어떤 달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한 번도 쉬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대신 월화수목금 중에 오프를 받게 되죠. 일하는 시간대도 참 다양해서 오후 3시쯤에 출근할 때도 있고 오전 11시에 퇴근할 때도 있었습니다. 일반 직장인들이 일할 시간대에 쉬는 그 쾌감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좋아서 대충 씻고 슬리퍼를 끌고 마트로 가 술과 안주를 잔뜩 쟁여옵니다. 하지만 술 마실 생각에 들떠서 낄낄거리며 집으로 가는 절 쳐다보는 이웃 주부님들의 표정을 보면 위축되곤 했습니다. 노동의 대가로 당당하게 받은 휴식인데, 괜히 제가 백수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힘들었던 취업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져 있던 탓도 있겠지만 9 to 6에 물든 편견 탓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직업이 수두룩 빽빽하게 존재하며 일하는 시간도, 형태도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아줬음 합니다.
오해는 받아도 일 안 하는 것처럼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쉴 수 있는 직종에 몸 담고 있다는 사실이 싫진 않습니다. 금방 질려버리는 성격에 이런 변수라도 있어야 생활이 즐거울 것 아닙니까. 맨날 기계처럼 9시까지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면 재미없잖아요?
타성에 젖을 바에 융통성 있는 생활을 즐기며 약간의 오해는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양념 정도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가끔 대낮에 술을 마시기도, 업무 시간 중 유튜브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욕하지 말아 주세요. 다 노동을 제공하고 받은 정당한 휴식이자 업무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짓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