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13화-직업병에 관하여
솔직하게 쓰겠습니다. 전 사람 좋은 척하는 극도의 예민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일 때문에 예민 성향이 더욱 극으로 치닫은 걸로 합리화 중입니다. 남 탓으로 돌리면 이렇게 된 게 오롯이 제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답니다.
첫 직장은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이었습니다. 1분 1초, 1kg과의 싸움을 벌이며 0.00001의 오차가 없는 로드 시트 (load sheet; 항공기에 실리는 화물, 가방, 승객의 무게와 위치를 계산한 서류 aka weight and balance manifest)를 만들어 비행기 출발 예정 시간 전까지 기장님의 승인을 받아 L1 (비즈니스 클래스와 연결된 도어)을 닫는 게 제 주 임무였습니다. 비행기 한 대 당 운항 관리 요원 한 명이 배정되는 시스템이라 200명 이상의 승객의 목숨과 몇 백 억씩 하는 항공기 하나가 내가 계산한 서류 한 장에 달려 있다는 부담을 혼자 짊어지고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항공 사고 발생 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이 로드 시트입니다. 작성된 로드 시트는 3개월간 운항관리 팀 서류함에 보관되는데, 슈퍼바이저가 불시로 감사를 실시해 계산에 문제가 있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으면 작성자는 그날 탈탈 털리는 겁니다.
신입 때는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았는데요, 항공 사고를 스터디하며 왜 그 사고가 일어났는지,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 그래서 생긴 룰이 무엇인지를 배운답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해주는 항공사고 다큐멘터리를 다 챙겨 볼 정도로 재난 덕후이지만 그게 내 일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나운서들이 생방송 시간에 못 맞춰 방송 펑크 나는 악몽을 꾸듯 비행기 문 닫을 시간이 됐는데 계산이 하나도 안 되어 있거나 비행기 잘 보냈는데 나중에야 계산 실수를 발견하거나 내가 띄운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하는 악몽을 매일 꿨습니다. 악몽은 부서 막론하고 찾아와 여객 부서 사람들은 본인이 여권 확인해 출국시킨 사람이 입국 금지를 당하거나 체크인 시간이 끝나가는데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어 닥쳐오는 그런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저런 곳에서 첫 사회생활을 배운 만큼 퇴사하고 나서도 예민함은 직업병으로 남아 저를 괴롭힙니다. 시간을 물어봤을 때 정확하게 몇 시 몇 분 몇 초라고 대답 안 하고 ‘한 세시 반쯤?’이라고 대답하는 사람한테 핸드폰 대기 화면은 장식이냐고 쏘아붙이고 싶다면 제가 쓰레기일까요? 또 100 페이지가 넘는 기획서에서 남들한텐 안 보이는 오탈자가 저한테는 왜 이렇게 뻔하게 잘 보일까요?
이런 저를 믿고 가끔 기존 서식 다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장표 만들어와서 알아서 쓰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습니다. 아니, 제가 pdf 파일로 구워서 파일 준 다음에 그거 보고 따라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ppt 열어서 클릭 한 번 해보면 폰트가 뭔지, 색상이 뭔지, 자간이 좁은 지 넓은 지 다 알 수 있는데 이런 사소한 노력조차 안 하는 사람은 한 소리 들어도 쌉니다. 카피라이터가 오탈자 잡아내는 맞춤법 검사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빨간 줄 그어져 있으면 우클릭해서 확인 한 번씩 해보고 넘깁시다.
공항을 떠나 광고로 업종을 옮긴 뒤 만난 첫 팀장 덕분에 저의 예민미는 더욱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넘긴 파일이 어떤 건 줄 뻔히 알면서 자리로 불러서 천진난만하게 ‘가람 매니저님 이게 뭐예요?’라고 묻던 첫 팀장님, 잘 지내십니까? 제가 보낸 파일은 당시 우리 팀이 발행해야 할 콘텐츠 기획안이었겠지요. 물론 입사한 지 2달이 안 된 신입의 결과물이 2년 차가 넘은 분의 눈에는 한창 부족했겠지만 그렇게까지 공개적으로 쪽을 당할 만큼의 퀄리티였나 하면 그건 또 아닌 거 같습니다. 아무튼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문서 “오와 열”을 맞추고 문서를 “예쁘게” 만들어가는 노력을 한 덕분에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에 지랄미까지 생겼습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쓸데없이 빡센 업계에서 일하고 쓸데없이 빡센 사람을 만난 덕분에 예민러와 일하는 스트레스가 어떤 건지 아주 잘 압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일하는 분들은 쓸데없는 예민함을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스케줄을 계산해 미리미리 일을 처리하고 더 좋은 글이 없을까 고민하는 업무 스타일은 ‘쓸데 있는’ 예민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신입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쥐 잡듯이 잡는 텃세나 알아서 해보라는 식의 방임이나 ‘나는 커피를 마시고 올 테니 넌 일을 하고 있으렴’ 이런 식의 꼰대 짓은 쓸데없는 예민함입니다. 많은 반면교사를 만난 덕분에 쓸데없는 예민함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본적인 노력도 안 하거나 요령 피우는 게 환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에겐 얄짤 없이 굽니다만 어차피 일할 거 다 같이 수평적으로 웃으면서 일하면 좋잖아요? 다들 기본은 지키면서 할 땐 빡세게 하고, 시간 남으면 자기 할 일 하면서 보내는 직장 생활이 제가 꿈꾸는 유토피아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나부터 선을 지켜야 합니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쓸데없는 트집을 잡거나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스케줄을 망치거나 하는 일은 금물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동료를 괴롭히는 짓도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당연한 소리가 누군가의 꿈이 될 만큼 우리네 직장은 아직도 쓸데없는 예민함으로 넘쳐납니다. 쓸데없는 예민함 근절 캠페인이라도 기획해야 할 판입니다.
팀원들의 수많은 아이디어 앞에서 결정을 미루고, 매번 “뭐 기발한 거 없어?”라며 무책임한 말만 내뱉는 사람. 그 바람에 주말까지 팀원들을 모두 출근시키는 사람. 그렇게 길어지고 늘어지고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를, 야근을, 주말 출근을 치열하게 사는 증거라 여기는 사람.
(중략)
왜 그런 사람들이 광고계엔 유독 많았을까? 왜 유독 그런 사람들은 ‘광고인’이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을까? 야근을 하며, 주말 출근을 하며, 생산성 없는 논쟁을 하며, 그것으로 광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증명하려 했을까?
<마감 일기> 마감 근육, 김민철, 놀, 2020, 20-21pp.
이런 광고인이 되지 않으려고 쓸데없는 예민함은 꾹꾹 누르고 쓸모 있는 예민함을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세운 잣대가 저와 남들에게 채찍이 되지 않도록 밸런스 유지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민한 직업병의 치료법을 찾아갈 때쯤 되니 눈과 손목과 어깨가 망가지는 또 다른 직업병이 찾아왔습니다.
회사 모니터 해상도가 너무 구려서 노트북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시력을 얻는 대신 어깨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 집 올 때 4캔씩 사 오던 수입 맥주도 포기해야 합니다. 하루종일 마우스와 키보드를 만지는 게 일인지라 오른쪽 손목께서도 사망하셨습니다. 버티컬 마우스로 바꿔 약간이나마 고통을 덜고 있습니다만 팔과 어깨와 연결된 근육들이 연쇄적으로 망가져 편두통까지 얻었습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신세가 된 요즘에는 버스를 타면 스마트폰 대신 창밖을 보며 요양을 즐깁니다. 그런 와중에 또 버스 광고 옥외 광고 폰트 맞추기 놀이나 하고 앉아있네요. 역시 꼬딕씨가 대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