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14화- 건강에 관하여
여러분, 저 퇴사했습니다. 박수 좀 쳐주십시오. 그 어렵다는 환승 이직까지 성공해 꿀 같은 이십여 일간의 휴가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회사 하나 안 나갈 뿐인데 일상이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직 사유를 물으신다면 매거진 전체를 할애해도 모자를 만큼의 에피소드를 들려드려야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정신이 못 버틸 거 같아서’였습니다.
마이보그 인터뷰에서 티파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인드, 바디 앤 소울이 연결이 되어야지 밸런스가 맞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맞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가장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균형이 치우치지 않은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야근이 없어서 몸은 편해도 감정 및 언어폭력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피폐해진다면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동료들이 너무 좋아도 야근으로 입술 전체가 수포 덩어리가 된다면 이 또한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남의 돈 벌어 먹고 산다는 게 워라밸 따위 엿 먹으라는 일상의 반복이더군요.
요즘 직장인들은 참 직장 가기 싫어합니다. 가서 몇 시간만 앉아 있으면 돈을 주는데도 월요병에 걸려서 일요일 저녁부터 벌써 우울해지죠. 역에서 내려 삼삼오오 걸어가는 직장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다 비슷비슷합니다. 뭐 대략 누구누구 죽여버리고 싶다, 때려치우고 싶다, 피곤해 죽겠다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출근을 하는 이유는 참고 견딜 만한 체력과 정신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지친 사람은 그런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탈수되어 본체는 침대에 내버려두고 껍데기만 돌아다닙니다. 퇴사 말기마다 제가 그랬었는데, 도보로 치고 들어오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전동 킥보드를 보며 차라리 저기 치여 죽었으면 좋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차도로 들어가기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무언가를 할 사소한 용기마저 없었던 게 퇴사 말기의 저였으니까요. 그러니 제발 누가 대신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우연한 이유를 만들어 주길 바랐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9시부터 6시까지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데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거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연봉 협상을 위해 돈 얘기를 꺼내자 바로 ‘내가 니 4월에 월급 올려준다 했지’히며 니니 거리는 대표 면상 보기 힘들어서, 그리고 명색이 광고 회사인데 B2B가 뭔지, IMC 전략이 뭔지 뭣도 모르는 실장, 다시 말해 대표 와이프가 출근한 뒤 여기는 콩팥 떼일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다니면 안 되는 곳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가뜩이나 작은 회사에서 직원들 가스라이팅 하고 꼰대질 하고 소리 지르고 벌금 물게 생기니 억울하다는 듯이 호소하는 대표와 반년 넘게 함께 하며 지쳐가던 참에 부부가 쌍으로 지랄을 하는 모습을 보니 사직서가 술술 써지더군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당하면 배로 갚아주는 크레이지 비치 성향인 저는 보란 듯이 이직에 성공해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표가 다른 직원에게 ‘가람이 쟤는 갈 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기 다니는 거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갈 데가 생겨서 저는 이만 떠납니다. 아디오스 사요나라 빠빠이 짜이찌엔.
잠시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적는 것만으로도 명치가 뜨거워질 정도니,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옛날 일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몇 달간 주말에는 일도 안 하는데 대상포진이 아닐까 의심되는 어깨 통증과 두통에 시달렸었으며 사무실 안에서는 누가 문을 ‘파캉’하고 열고 들어올 때마다 흠칫하고 놀라곤 했습니다. 동료들은 웃어넘겼지만 대표와 좁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동안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걸 보면 농담으로 넘길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원 충원 계획이 없냐는 질문에 ‘싸가지 없는 년’이라는 말로 답하는 대표의 태도를 보고 견딜 수 없어 근처 정신상담과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상담료는 시급 인생을 사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라 전화를 끊었습니다.
연초에는 한 달 내내 꺽꺽 울다가 잠들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마도 동료들의 잦은 퇴사와 변함없이 뭣 같은 대표의 태도와 감, 그리고 그런 곳도 회사라고 아등바등 출근하는 제 모습이 싫어서겠지요. 그래도 니가 가진 것들을 믿고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런 데 다니기 싫으면 당장 때려치우고 이직 준비해라 이런 말은 번아웃 or 우울증이 온 사람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때 다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결국에 그 구렁텅이를 빠져나오게 한 건 제 내면의 힘 이더군요.
간사이 공항을 그만 둘 때도, 이전에 다니던 광고 대행사를 그만 둘 때도 참 많이 아팠습니다. 일본의 여름은 한국보다 습하고 덥다는 사실, 알고 계신지요. 그런 날씨에 저는 컴퓨터와 장비와 서류를 짊어지고 시프트에 맞춰 새벽부터 새벽까지 공항을 뛰어다녔습니다. 운항 관리사라는 게 여기서 부르면 뛰어가고 저기서 부르면 뛰어가는 직업인지라 물 마실 시간 없이 개처럼 일하다가 쓰러질 뻔했습니다.
퇴근하고 집 근처 병원에 가니 탈수랍니다. 하하. 링거를 연결해 소금물 같은 걸 두 어 시간 맞고 포카리 스웨트를 사 와 마시고 잠에 들었습니다. 상관에게 전화하니 다음 날까지 쉬고 나오라는 데, 몸 망가진 게 하루 쉰다고 해서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이때부터 슬슬 퇴사 생각이 스며 올랐던 거 같습니다.
이전 광고 대행사는 광고쟁이들조차 치를 떨 정도로 야근을 시켰습니다. 아프면 집에 보내야지, 링거 맞으면서 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미친 사상을 주입당한 이들이 일하는 곳이라 칼퇴 얘기를 꺼내면 반란 분자 취급을 받았었습니다. 야근만 시키면 양반이지, 20대 초중반으로 이루어진 고인물 집단에서 벌어지는 뻔한 꼰대짓 때문에 싸바싸바를 못 하는 신입 (= 나)은 눈엣가시가 됩니다. 몇 천만 원을 날려 먹은 것도 아니고, 팀 회의 자료 문서 오와 열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사람들 다 보는 데서 태움을 당하는 곳이었죠.
아무튼 그런 데서 일을 하려니 몸이 성하겠습니까. 죽음의 근육통 때문에 책상에 엎어져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누워있더니 병원에 가보랍니다. 그리고 받은 진단은 A형 독감. 당시 아직 신입인지라 저 없이도 팀은 잘 돌아갔기에 며칠 병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링거를 맞으며 빠른 퇴사를 기원했습니다.
이게 다 먹고살자는 짓을 하다가 당할 일들입니다. 한국인은 과로라는 말에 아------------주 둔감해서 오죽하면 한국의 하이틴은 <스카이캐슬>, 직장은 <미생>, 사후세계는 <신과 함께>라는 글이 떠돌겠습니까. 한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 게 한국인이라 자기 몸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한 달 넘게 티가 날 정도로 몸, 혹은 정신이 아프다면 잠시 그만두는 것도 정답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던 대상과는 다른 대상과 환경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스트레스에서 잘 회복하고는 하나도 바뀌지 않는 환경으로 돌아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과로한다면, 얼마 안 가 비슷하게 번아웃이 오지 않을까요?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안주연, 창비, 2020, 126pp.
혹은 반차라도 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잠깐의 휴식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해결책 마련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못 버티겠다 싶을 때 월차를 내고 혼자 인사동을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전시회도 보고 맛있는 칵테일도 마시니 다시 열심히 이직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리고 각자의 사정이 있는지라 함부로 퇴사해라 마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는 뭐든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거 하나만은 잊지 말고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고달프고도 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근로 환경을 조금은 덜 고달프고 덜 맵게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욕을 먹더라도 노동자 (乙)의 편에 서서 글을 써 내려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