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오하세요 독립의 숲

시급 인생 15화- 독립에 대하여

by 가람

난 독립이 하고 싶으면 통장 잔고를 봐

아빠와 대판 싸우던 날 30일 내로 방 빼고 나가서 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3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얹혀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오리까. 당시 월급 백구십일만 칠천 원에서 노트북 할부금 30만 원, 적금 50만 원, 통신비 십일만 삼천칠백이십 원, 보험금 팔만 구천 사백 구 십팔원, 어도비 결제비 만천 원, 거기다 교통비 10만 원이 빠져나가면 정작 쓸 수 있는 돈은 80만 원 남짓입니다. 이 돈으로 나가 살라니요.


전세 자금 몇 천을 모으는 것보다는 월세를 내는 게 나을 듯하지만 서울 월세를 부담하고 나면 전 빈털터리가 될 겁니다. 아, 각종 관리비와 식비를 깜빡했네요. 퇴사하기 전에 신용카드를 만들어 두어 다행입니다. 신용카드라도 없으면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할 테니까요.


천지삐까리한 인테리어지만 한번 해보고 싶잖아요..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이렇게나 많은 지출을 감당하면서까지 이십 대 후반쯤 되면 다들 독립을 꿈꿉니다. 오늘의 집 광고에서나 볼 법한 흰 침구류, 라탄 테이블과 마티스 액자,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선홍빛 튤립으로 자취방을 꾸미고 아보카도가 들어가는 음식을 옴뇸뇸하고 싶어 지는 욕구에 휩싸일 겁니다. 예, 제가 그렇습니다. 브이로그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요?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만 지금 그렇게 안 살면 언제 또 혼자 소꿉놀이하면서 살아보겠습니까.






튀어나와요 스토커의 숲


제 데뷔작 <안 상, 들어오세요>를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은 저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이 하고 싶어서 일본 교토로 떠난 사람입니다. 꿈☆은 이루어져 대학 생활 4년, 그리고 졸업 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근무하며 약 1년간 나 홀로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래 봬도 자취 경력 도합 5년차랍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자취 경력은 계속될 줄 알았지만 서울의 마천루 같은 월세 때문에 소망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인데, 자취를 하면 좋은 점이 매우 많습니다. 먼저 연애하기가 수월합니다. 막차가 끊기면, 술집이 문을 닫으면 고민 없이 손잡고 우리 집으로 가면 되는 겁니다. 대실비 한 번 아끼겠다고 월세와 관리비를 부담하는 게 말이 되냐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취는 연애에 있어서 여러모로 좋은 투자입니다. 또, 식구 사이도 돈독해진답니다. 가족끼리 친해지는 방법은 가끔 보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취를 하게 되면 먹기 싫던 집밥도 문득 떠오르고 매일 듣던 살림 소리도 그리워지는 마법이 벌어집니다.


"라면... 먹고 갈래요?" 요즘 말로하면 "Netflix and chill?"


그 외에도 많은 장점이 있지만 당장 누가 집을 구해준다고 해도 나가 살 용기가 없습니다. 아무리 치안이 좋다고는 해도 세상 구석에는 분명히 무서운 놈들이 존재하고 그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제가 이렇게 밤길을 걱정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대학 졸업 후 간사이 공항에서 운항 관리 요원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공항 근처에 맨션을 얻어준다는 문구에 속아 지원한 파견 회사에서는 역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국도 한복판에 있는 맨션을 소개해줬습니다. 소개라기보다는 입주 서류를 눈 앞에 들이밀고 도장만 찍으라는 협박 아닌 협박이었습니다. 파견 회사 직원인 후지와라 아저씨는 동물의 숲에 나오는 악덕 너굴 사장 마냥 사회 초년생 외국인에게 눈감코베 스킬을 시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월급에서 월세 50만 원을 따박따박 빼갔죠.


웃으면서 돈 뜯어가는 천하의 나쁜 놈
정말 정붙이기 힘들었던 샹소니에팔레스


공항 근처 동네는 도심에서 매우 떨어져 있어서 치안이 좋지 않습니다. 24시간 시프트에 따라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늦은 밤이나 새벽에 홀로 걸을 때면 괜스레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새벽 근무에 이골이 나기 시작한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던 시각 파출소 옆 편의점에서 술과 아침거리를 사서 이어폰을 꼽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100미터 뒤에 웬 아저씨가 서 있네요?


공항에서 근무하는 다른 부서 아저씨인가보다 하고 다시 걷는데 촉이라는 게 발동했습니다. 이어폰 볼륨을 0으로 낮춘 뒤 조심스럽게 집 앞 주차장까지 가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더군요. 하지만 예민해진 제 촉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공동 현관문에 열쇠를 꽂기 전 다시 한번 더 뒤를 돌아보니 그 새끼가 제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


관상은 딱 일드 <라이어 게임>에 나오는 요시요시 아저씨 같았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쌍욕을 퍼부어주었습니다. 다행히 그 새끼는 날붙이는 들고 있지 않았으며 캔맥주로 뚝배기 한 번 때리면 쓰러질 법한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였습니다. 한국 쌍욕으로도 안 먹히면 몸으로 어떻게 해볼까 하고 있는데 처음 듣는 상스러운 소리에 놀라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더군요.


당장 파출소에 신고를 하니 전투복을 입은 경찰 4명이 출동했지만 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낡아빠진 맨션에 CCTV가 있을 리 만무하고… 당분간 새벽 순찰을 강화하겠다는 경찰의 말을 믿고 후덜거리며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방에 도착했지만 그 새끼가 어디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도 켜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밤을 지새웠죠. 그 사건 이후 저는 새벽 퇴근을 할 때마다 아빠를 깨워 LINE 통화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날 음악 볼륨을 줄이지 않았더라면, 공동 현관 앞에서 한번 더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런지요. 인터넷이나 미디어에서 이보다 더 한 스토커 썰을 접해봤지만 제가 직접 겪어 본 스토커가 제일 무섭더군요. 그로부터 약 3년이 흐른 지금, 저는 아직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 인기척이 나면 흠칫 놀라곤 합니다.






나랑 살든가 아니면 말든가


이럴 때 당장 불러내 끌어안고 있을 애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왜인지 애인이 필요한 순간마다 저는 솔로였습니다. 앞으로 독립을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영화 <도어락>을 보면 건물 관리인도 믿을 만한 놈이 못 되는 것 같고, 또 왠지 그때도 솔로일 것 같고… 아무튼 그래서 덜컥 독립하기가 겁이 납니다.


돈 없어서 독립 못하는 것도 맞는데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귀신도 아니고 사람 아니라잖습니까. 사람이 무서워서, 무서움을 상쇄시켜줄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없습니다.


새롭게 만나게 되는 남자들은 제 글을 몰래 읽어보곤 합니다. 이십 대 초반에 쓴 글을 읽고 저를 뼛속까지 비혼주의자로 오해해 만남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요, ‘너랑은 결혼까지 못 갈 거 같다’는 이유로 차이는 마당에 앞으로 혼자 살게 될 확률이 월등하게 높은데,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오늘 밤이 외롭다면 모르는 척 안아줄게♪ 이미지 출처: 펜타곤 'Baby I Love You' 쇼케이스


불안정한 독립을 그리는 것도 지쳤고 이제는 저도 누가 ‘나랑 살든가 아니면 말든가♪’하면서 데려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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