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goes on

시급 인생17화-자기계발에 대하여

by 가람

계발하는 인간, 개발되는 인적자원


2020년 트렌드로 떠오른 개념 중 하나가 ‘업글인간’입니다. 영어 ‘업그레이드’와 한글 ‘인간’이 합쳐진 신조어로, 본인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이에 행복을 느끼는 인간이라네요.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면에서는 능력주의, 경쟁주의의 압박을 벗어던졌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저는 이 ‘업글인간’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듭니다.


업글인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upgrade) 하기 위해 열중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성공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새로운 자기계발형 인간.

'남들보다 나은 나'가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나'를 지향한다.
단순한 스펙 쌓기가 아닌 ‘나’에게 보다 초점을 맞추고, 운동이나, 취미, 지식 쌓기에 투자하며 이를 꾸준히 함으로써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한다.


실은 업글인간의 개념은 이미 ‘자기계발’이라는 단어를 빌려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서점에는 ‘누구나’ ‘쉽게’ ‘한 달 만에’ 독학할 수 있는 자격증, 재테크, 마케팅, 편집 기술 등 자기계발 서적이 나래비로 꽂혀 있지만 전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왜냐, 먹고살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서서 8시간 근무를 마친 뒤 오후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직장인에게 자기계발이라뇨.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듭니다. 미라클 모닝에 도전하는 분들이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저는 반대 같습니다만


저도 처음부터 눈 뜬 김에 출근하고 퇴근해서 발 닦고 자는 기계 같은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카피라이터 김민철 님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사표를 쓰고 싶을 정도로 끝이 없는 야근에 죽고 싶어도 퇴근 후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음미하거나 라틴어를 배우거나 도예 공방으로 향해 도자기를 빚는 생활을 하신다고 합니다. 카피라이터가 되면 오후가 있는 멋진 삶을 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만, 개뿔. 나중에 직장 다니면 퇴근하고 나서 바나 펍에 들려 술 한잔 하면서 책 읽는 게 꿈이라는 제 말에 ‘넌 체력 약해서 그러다 쓰러져’라고 한 아빠 말이 맞았습니다. 주말에는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래오래 잠만 자는데, 내 글 교정 볼 시간도 모자랍니다.






하루도 맘 편히 쉴 수 없던 내가


환승 이직을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 한 면접관은 어떻게 회사 다니면서 꾸준히 자기 글을 써낼 수 있는지 놀라워했습니다. 그분은 퇴근하고 나면 활자 따위 쳐다보기도 싫으시답니다. 한창 반차를 내어 면접을 보러다니던 시절, 옛 팀장님과 통화하는데 팀장님 역시 퇴근 후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저를 신기해했습니다. 제가 관종이라서, 가슴속에 있는 흑염룡을 분출하지 않으면 못 배겨서 그런 것도 있는데요, 실은 다 불안해서 그런 겁니다.


한시간을 훌쩍 넘긴 화상면접. 16.FEB.21


슬프게도 야근이 많아서, 업무량이 살인적이라 자기계발을 할 시간이 없다는 변명은 광고계에 발을 들인 시급인생러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저어기 위에 계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님 급의 안목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배워야 할 기술은 많고 경험해야 할 프로젝트는 넘쳐납니다. 게다가 이제는 치고 올라올 후배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초등학생은 코딩을 필수과목으로 배운다네요. 유튜브에 깔쌈한 편집술로 브이로그를 찍어 올리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밥 벌어먹고 살 때쯤이면 전 완연한 시니어가 되어있을 텐데, 이런 것도 모르냐고 욕먹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파워포인트 모르겠다고 멋쩍게 웃던 누구 비웃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야 어리다고 해주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직도 어려울 거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 있을 겁니다. 전세방을 얻는다 쳐도 사람 구실 하려면 월 200만 원 이상이 필요합니다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시급인생, 어쩌겠습니까. 업그레이드하고 또 업그레이드해야죠. 카피라이터지만 퍼포먼스 마케팅에 포토샵까지 할 줄 알면 있어 보일 것 같아서 혼자서 알음알음 익혀봅니다. 할 줄 아는 게 많다는 건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라 회사에서는 쉬쉬할겁니다만… 이런 것도 모르면 업계에서 도태되는 거 아닐까 싶어서 전전긍긍하며 뭐 배울 거 없나 냉장고 뒤적이듯이 인터넷을 어슬렁거립니다.


workworkworkworkwork... 04.JAN.21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광고인 중에서도 제작 파트 사람들은 회사 일 이외에도 몰래 사부작거리면서 외주를 뜁니다. 필수는 아니지만 타 업계 대비 현저히 낮은 연봉 테이블을 내딛고 일어서려면 투잡, 쓰리잡을 뛰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취준생을 위한 오디오 콘텐츠 녹음을 하거나 e-Book 발간을 위해 주말 없이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봐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한 달에 고작 몇 천 원 더 들어올 뿐인데도 ‘회사 일만 하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합니다.






넘버원 보단 온리원


이러쿵저러쿵한 이유로 ‘왜 업글인간이 되어야 하나?’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자기계발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쉬고 싶어도 열심히 외주를 뛰는 동료들이나 내가 가지지 못한 기술을 지닌 크리에이터를 보면 배가 아파 누워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남이 아닌 저를 위해서 하는 자기계발이 있습니다. 바로 글쓰기입니다. 개인적 글쓰기 (브런치 등)와 실무 (카피라이팅)의 상관관계를 물은 면접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얘기했죠. 한 줄이라도 더 많이 써봐야 글을 더 잘 뽑아낼 수 있고 글 쓰면서 스트레스 푸는 것도 있다고요. 그런데 정말 이게 맞는 말 같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쫌쫌따리 모아두었던 글감이나 소재는 업무 중 가끔 짠 하고 도움을 줄 때가 있습니다. 또, 하루종일 쓰기 싫은 글을 쓰다가 쓰고 싶은 말을 막 쓰다 보면 희열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이 맛에 글 쓰나 싶습니다.


이슬아 작가님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얕고 많은 스킬과 깊고 온니 원, 하나뿐인 스킬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전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제게 그 스킬은 글쓰기가 되겠지요. 이 시국에 살아남으려면 얕고 깊은 스킬도 많이 익혀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하나씩 배워가다 보면 몸에 익는 날이 오겠죠. 그러니까 우리 너무 초조해하지 맙시다.

이전 07화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