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18화-휴식에 관하여
할 일이 많은 직장인은 공휴일이 밉습니다. 다들 무슨 공휴일이 일을 향한 비토(veto)권이라도 되는 마냥 빨간 날 전날 퇴근 시간만 되면 집에 꿀단지 숨겨놓은 사람들 마냥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공휴일이 끝나면 휘몰아 닥칠 후폭풍을 외면한 채 말이죠. 추석 전 마지막 공휴일인 부처님 오신 날 전날, 쳐내야 할 것들은 산더미 같은데 집에 가고 싶어 하는 팀원들을 붙잡고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혼자 마무리를 하고 퇴근하는 길, 헛헛한 마음에 예전 팀장님께 연락을 했더니 ‘일복을 끌고 다니는 팔자’라고 하십니다.
직장에 다니면 철학적 사고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이게 뭐라고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걸까?’ ‘10년 후의 나는 과연 이 바닥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등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암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저도 빨간 버스에 몸을 싣고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을 못 하는 걸까, 못 하는 척하는 걸까?’ ‘레퍼런스는 어디까지나 레퍼런스인 걸 모르나? ‘요즘 신입들은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 생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의 꼬리는 억지로 끊어주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새끼를 칩니다. 그래서 알코올 500ml에 기대어 잠을 취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들어오기 전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아니면 잦은 퇴사와 인간을 향한 환멸을 겪으며 피로에 대한 역치가 저 아래까지 내려갔나 봅니다. 입에서 단내 날 정도로 일 많은 회사만 골라 다니다 보면 배터리 방전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최대치였던 성능이 금세 7~80%까지 떨어져 한 달이면 그동안 쌓아온 인사이트며 체력이며 바닥을 칩니다. 벼랑 끝에 서서 일하는 기분이랄까요.
잘 쉬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언가를 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완벽주의자인 저에게는 이거야 말로 휴식을 위한 최고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협업하는 직장인들에게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휴일 전까지 일이 끝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벌써 4번째 직장을 뒹굴며 내린 결론은 ‘나만큼 일 잘하는 사람은 없다.’입니다. 저도 얼레벌레 아 몰라 하면서 눈에 보이는 일을 미루고 싶지만 성격상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그러는데 말이죠. 그리고 여기 대단한 협업의 결과 끝맺지 못한 일들에 괴로워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연차가 붙을수록 책임 범위도 늘어나 휴일에도 똥줄을 태우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습니다.
광고일, 특히 SNS 운영을 하다 보면 삶과 일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워라밸 면에서도 그렇지만 쉬려고 보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텔레비전이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손가락은 자꾸만 운영 중인 계정이나 사내 메신저를 클릭하게 됩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혹여나 이상한 댓글이 달리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급하게 요청한 게 있지 않을까 급급해하면서 말이죠. 무슨 일이 터지면 제가 찾아 들어가 보기 전 위에서 알아서 전화가 올 텐데, 참 걱정도 팔자입니다.
나는 내가 읽고 보고 느끼는 그 자체
진정한 휴식은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광고쟁이들에게 생각을 비우는 건 5성급 호텔 급 사치입니다. 끊임없이 나가야 할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적어도 며칠간 벼랑 끝에 서서 일하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선 뭐라도 봐야 합니다. 코스모폴리탄 5월호를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니어 마케터 시절, 어떻게 하면 돈을 알뜰살뜰하게 모을까 고민할 때 계속 옆에서 “살까 말까 할 땐 사라”고 하고, 마케터가 얼마큼 경험하느냐에 따라 마케팅 실력도 차이가 난다고 하던 상사 덕분에, 나는 경험을 소비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게 됐다. (중략) 마케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무언가를 사기로 선택할 때 느끼는 감정을 역으로 써먹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것을 나는 마케터의 ‘소비의 쓸모’라고 부른다.
COSMOPOLITAN 5월호 <소비의 쓸모-마케터 4명에게 물은 소비의 의미.> 256pp.
그렇답니다. 연봉 테이블은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조그맣지만 성장을 위해선 나를 위해 잘 쓰는 방법도 궁리해야 하는 게 광고인들의 숙명입니다. 분명 어떤 회사든지 일 못 하는데 뻔뻔하게 엉덩이 꾹 붙이고 앉아있는 고문관 한 두 명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이를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영감을 얻어 고문관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나 혼자 피아니스트 마냥 타자기 두들기며 일하고 있다 보면 억울함이 솟구쳐 나도 저런 얼레벌레한 고문관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만, 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겠습니까? 그냥 실력으로 조지는 수밖에요.
어디 마음 기댈 구석 없이 일을 하다 보면 내 연봉이 쪽팔려서, TV도 못 끈 채 안경 쓰고 자다 일어난 내 모습이 처량해서, 내가 운전대 잡고 액셀을 밟아도 창문 깨고 도망칠 누군가가 있을 게 뻔해서 쉬이 지칩니다. 쉬는 법도 잊은 지 오래고요.
얼마 전 본 영화 속 주인공은 ‘사람은 본인이 생각한 만큼 사랑받기 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피곤에 찌든 나도 나니까, 나라도 나를 사랑해주기로 했습니다. 곧 다가올 생일을 위해 사고 싶었던 향수와 반지와 오브제를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습니다. 생일이 주말이라 억울해서 월차도 낼 겁니다. 맨날 회사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허지웅 님의 말처럼 규칙적으로 출근해 누군가와 소통하며 업적을 일구는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잘 쉬는 법은 잊어버렸을지언정, 누리고 싶은 건 다 누리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