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게 미쳐가는 중입니다

시급 인생 outro

by 가람

양손에 한 달치 적금을 끼고 다니는 사람


<시급 인생>을 쓰기 시작해 햇수로 3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네 번의 이직을 거쳐오며 직장은 바뀌고 또 바뀌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제 인생도 이 작품의 목차를 따라가게 되더군요. 동료에 관해 쓸 때는 둘도 없는 동료애를 느끼며 행복해하기도, 퇴사 매뉴얼에 관해 쓸 때는 또 한 곳을 떠날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업무가 너무 바빠서, 혹은 처음 겪는 일들 때문에 힘들어하며 연재 공백이 길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듯 글도 쌓이고 쌓여 어느새 연재도 마지막에 다달았습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지금 정도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면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의 착각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정상인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들이 있으며 그걸 받아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절망과 좌절을 겪다 보면 나만의 스트레스 돌파구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답답할 때면 퇴근 후 반지를 사고 맛있는 걸 먹습니다. 28. JAN. 22


저에겐 반지를 사 모으는 일이 그랬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혹은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반짝이는 반지를 샀습니다. 출근 전에는 총탄을 챙기듯 좋아하는 향수 칙칙 뿌리고 양손에 몇 개씩 반지를 끼고 문을 나섰습니다. 반지는 하나에서 둘, 셋, 넷으로 금세 늘어나더니 어느새 양손에 한 달 치 적금을 끼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다가 화가 날 때마다 키보드 위의 제 손을 쳐다보며 마음을 다스리곤 합니다.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건강의 척도는 아니다


반지를 그만큼 사 모았다는 건 연차가 차 직급과 연봉이 올라가도 먹고사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는 뜻입니다. 제가 회사에 요구하는 건 1. 업무 외적인 것들로 사사건건 건들지 말 것 2. 업무를 위한 환경 조성과 제대로 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 딱 이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걸 지켜주는 회사를 찾는 건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 일과도 같았습니다.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건강의 척도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전 직장 대표한테 하도 시달리던 중 번아웃에 관한 책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인데 최근에 다시 읽어도 '과연'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군요.


일 년 만에 다시 읽는 책이지만 같은 구절에서 공감하게 되더군요. 17. FEB. 22


그동안 뭐가 그리 힘들었는지 생각을 해보자면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야근, 과도한 업무, 실무를 모르는 경연진, 젊은 혹은 늙은 꼰대, 담배 냄새 폴폴 나는 회의 시간, 가족에게조차 말하기 부끄러운 월급, 나 몰라라 하는 태도의 동료들, 막말로 나를 키우려는 상사, 긴 통근 시간 등 어디를 가나 저 요소들 중 다양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래도 깡과 오기로 버티다 보니 연차와 포트폴리오라는 걸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잔잔하게 미쳐버린 K-직장인의 표본이 여기 완성되었습니다.






제가 버텼다고 해서 신입은 무조건 1년 버텨라, 라떼는 더 심했다, 힘든 것도 다 경험이다… 이런 말은 결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시급 인생>에 실린 모든 글들이 누군가에게 대리 경험이 되어 주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이 글에 맘 편히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고픈 직업의 현실을 알고도 일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끊일 줄 몰라 2022년 2월에도 전 더 나은 제가 되기 위해 고민 중입니다. 시급 인생이라도 직급도 달아봤고, 사치도 부려봤고, 연애도 해봤고, 저축도 해봤고 효도도 해봤습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본 거, 그 힘든 걸 해낸 저에게 칭찬해주고 만족하렵니다.


<시급 인생>은 마무리되었지만 앞으로도 직장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은 다른 기획으로 계속될 듯합니다. 그동안 쉬었던 영화에 관한 글도 새로이 써보고 싶습니다. 더욱 옹골찬 글을 위해 읽고 보고 느끼는 그런 시간도 가져보려고 합니다. 날씨가 또 추워졌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 힘들더라도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부디 여러분의 자리에서 잘 버텨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급 인생을 걷고 있는, 앞으로 걸어갈 이들과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선후배들, 동료들, 그 외 스쳐 지나간 모든 인연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2022년 02월 20일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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