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며

시급 인생 29화-이제는 바뀌었으면 하는 것들에 관하여

by 가람

성인이 되면 누구보다 멋있게 살 줄 알았던 어린 날의 나에게 미안해


드라마 <그 해 우리는> (SBS, 2021) 1화 중 10대 끝자락에 서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던 ‘연수’와 ‘웅’은 ‘십 년 후의 모습은 어떨 것 같나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에 만년 전교 1등 연수는 본인의 미래는 아주 대단할 것이라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십 대 후반의 연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경제적 궁핍, 실적 압박, 어딘가 모를 공허함 등 철저한 을의 삶이었습니다.


중소 홍보기획팀, 동태 눈빛, 성공적. 이미지 출처: <그 해 우리는> 1화 중 (SBS, 2021)


저 역시 열여덟 여름, 학교 운동장에 앉아 친구들과 ‘10년 뒤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물여덟이 되면 집도, 차도, 남편도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손에 넣지 못했으며 여전히 내 마음은 잘 모르겠고 이뤄내야 하는 약속, 지켜내야 할 것들만 늘어날 뿐입니다. 몇 년 전과 비교해 연봉으로만 보면 시급 인생은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임금 대비 살인적인 업무량에 몸서리를 치고 있습니다.






영감의 원천은 입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스물여섯에 쓰기 시작해 스물여덟 오늘날까지 꾸준히 연재해온 <시급 인생>의 마지막 화를 쓰는 현재, 우연인지 운명인지 시급 인생에도 마침표를 찍고 이제는 밥값을 해내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밥값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고작 10~20만 원 더 주는 주제에 그에 제곱한 책임감과 퍼포먼스를 원하는 사업주 때문에 직장 생활에 흥미를 잃고 하루하루 돈 받는 만큼의 퀄리티로 업무 쳐내기에 바쁩니다.


・2022년 1월 기준 최저 시급 9,160원. 월급으로 치면 19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정도.

・2022년 광고 업계 신입사원 초봉 약 2,300만 원. 세금 다 떼고 이것저것 받으면 190만 원 조금 웃도는 정도.


2022년 최저시급은 9,160원으로 전년 대비 440원 인상했습니다. <시급 인생>이 처음 연재되던 2020년 8,590원 보다는 570원 올라갔습니다. 최저시급 받으며 주 5일, 8시간 일한다고 치고 월급으로 환산하면 세전 190만 원, 연봉 2,300만 원 정도가 되겠네요. 적금, 주택청약, 식비, 교통비, 커피값 등 빼면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네 최저시급이 오르면 물가도 정비례해 이젠 호텔 저녁 뷔페 4인 가족 기준 60만 원을 내고 수입 맥주 4캔을 만 원 하고도 천 원을 더 주고 사야 할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신입 초봉을 2,200에서 2,400으로 후려치는 사장님들, 혹은 경력직이라도 수습 기간에 80% 밖에 못 주겠다는 사장님들 보고 계신가요?






사업주와 을(乙) 사이에서 생겨나는 마찰의 원인은 대부분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뽑았겠지만) 처음 몇 달간은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고 싶은 마음이 당연할 것이고, 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실력을 뽐내기 위해선 작업에 앞서 충분한 대우와 금전적 보상을 원할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랄까요. 어찌 됐든 1원이라도 아끼고 싶은 게 고용주지만 1원이라도 더 받고 싶은 게 을의 마음입니다.


이미지 출처: 스브스뉴스 <문명특급> EP.89 중


작곡가 김형석 님은 ‘영감의 원천은 입금에서 나온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셨죠. 저 역시 읽고 보고 느낀 걸 버무려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야 하는 사람으로서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는 허영심도 허세도 아니라 실제로 먹고살 길이 뚫려야 삶에 대한 일차원적인 걱정을 할 시간에 ‘크리에이티브’라는 거에 뇌 용량을 할당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제가 그랬듯이 돈이 없어서 아무 직장이나 골라 들어가 고생만 하다 나오거나, 진급을 위해서 수당 없는 야근을 강요당하거나, 꼼수를 써가며 최저임금보다 꼴랑 1천 원 더 주며 생색내는 고용주에게 굽신거리는 일은 앞으로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바뀔 건 없다는 단념은 접고 미운털 박히더라도 꾸준히 투덜거린다면 이 문제의식에 동참해줄 누군가들이 늘어나리라 믿으렵니다.






회사에 왜 엄마 아빠는 없어요?

기소불욕 물시어인


‘막내’라는 말이 참 싫습니다. 연차가 가장 낮다는 이유로 화분 물을 갈거나 다 먹은 야식거리를 치우거나 커피 머신을 닦아야 한다는 룰은 없습니다. 집안에서도 막내에게는 손에 물이라도 닿으랴 금이야 옥이야 하지, 그런 궂은일 시키진 않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만큼은 짬 처리시켜도 되는 사람으로 막내의 뜻이 변질되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럼 전 입버릇처럼 ‘막내가~~’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회사에 왜 엄마, 아빠, 언니, 오빠, 형, 누나는 없어요?’ 라고요. 신입들의 설움을 디펜스 해줄 사람은 왜 없냐고, 왜 신입들의 작업물을 책임져줄 사람은 없냐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을 외면하기만 하더군요.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을 시키지도 말자는 뜻입니다. 물론 업무적으로 자잘한 것부터 신입이 배워 나가야 할 것들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 부서 막내에게 본인이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상사나 업무 외 심부름을 시키는 걸 당연시 여기는 젊은 혹은 늙은 꼰대들을 보면 치가 떨려옵니다.


신기하게도 이런 일을 디펜스 해주는 선배는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 혼자 신입들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떠맡을 때마다 왁왁 거리며 대신 싸워주고 정당한 근무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얼터구니 없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후배들과 제가 직장 동료 이상의 사이라든지, 너무 친해서 한 번 밟아야겠다든지… 조용히 일만 하게 내버려 두면 가만히 있을 텐데 왜 쓸데없이 건드려서 팀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사람을 프로 이직러로 만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회사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옥상 가는 횟수만 늘어납니다. 13. JAN. 22






가늘고 길게 살고 싶습니다


가장 최근에 면접을 보던 어느 날, 대표님은 제 잦은 이직의 이유가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 탓인지, 혹은 회사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 때문인지 물어봤습니다. 전 망설임 없이 후자라고 말했고, 이제는 부디 1년 이상 무난하게 다닐 회사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입사한 지 겨우 첫 30일이 지났을 뿐인데 업무는 미쳐 돌아가고 있고 벌써 제 성격 파탄자 같은 인성은 다른 사무실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공황이 올 것 같아서 직속 상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마음이 후련한 건 그때뿐이었습니다. 시급 인생이 끝나면 행복한 회사 생활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지금도 회사가 싫고 제대로된 직급과 체계나 차려준 다음에 업무를 맡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난 친절합니다. 난 당신을 짜부시키지 않을 겁니다. (단지 업무 때문에 피곤할 뿐) 16. JAN. 22, 데이비드 슈리글리 展 에서


시급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며 느낀 건 전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고 일을 사랑하지만 업무 외 적으로 회사에서 벌어지는 속 시끄러운 일들을 (이를 테면 뒷담화, 꼰대 비위 맞추기, 텃세, 기싸움 등)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기에는 예민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래서 술과 아이돌 없이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적당한 환멸감을 느끼며, 사람들과 적당히 부대끼며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하는 건 즐겁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적어도 날이 따뜻해질 때 까지는 열심히 일이나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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