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28화-그만두고 남은 것들에 관하여
우리는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동진 영화평론가님의 <우리가 도망쳐 온 것들> 中
잦은 이직을 해왔다는 건 많이도 도망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 내면에는 일이 하기 싫은 마음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더 크게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망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용기 깨나 필요한 일이었죠. 초년생에게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서운 일이었고 그만둔다는 건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포기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었습니다.
지금이야 일주일 정도 출근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더 인볼브 되기 전에 퇴사 처리 부탁드린다고 솔직하게 인사를 하고 나오지만 2년 전만 해도 그러지 못했었죠. 첫 광고대행사를 4개월 만에 그만둘 결심을 했을 때는 혹여나 회사에서 욕을 먹진 않을까 말을 꺼내기까지 몇 주간 전전긍긍하며 맘고생을 했었습니다.
왜 ‘퇴사’라는 단어를 꺼내면 사람들이 색안경 낀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생각해봤는데 퇴사도 결국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요? 그래서 퇴사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퀘스트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우울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무던히 버티는 거, 그거 하나를 못 하고 몸 혹은 정신이 힘들어서 백수를 자청하는 그 마음을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질하겠지만 저는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별다를 게 없기 때문이죠. 저는 도망치는 게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동진 평론가님의 글처럼 우리는 매번 도망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항해를 떠날 추진력을 얻습니다.
시급인생으로 살아오는 동안 제가 첫 직장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한국으로 돌아와 광고일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며, 첫 광고대행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주도적으로 일을 해내는 성취감을 느낄 수도, 지금까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는 분들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다음 회사도, 다음다음 회사도 그만두지 않았다면 새로운 사업 분야나 문화를 접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며 그 경험을 이렇게 글로 녹여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저를 이루는 요소들은 어딘가에 정착함으로써가 아니라 도망침으로써 일궈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2018년 2월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시급 받아가며 밥벌이를 시작해 약 1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다시 광고일을 시작해 여러 회사를 전전했습니다. 첫 월급을 받던 그날로부터 벌써 햇수로 4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초봉 2,200만 원을 회사로부터 통보받던 시절을 지나 연봉 협상이란 걸 하며 시급 같은 월급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업무범위도 늘어나 입사 첫날부터 퍼포먼스를 보여달라는 말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경력, 직급, 연봉이 올라간 것보다 더 기쁜 건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전이야 뭣도 모르고 입사 첫 주부터 12시까지 수당 없는 야근을 하거나 매일 아침 대표에게 커피를 타다 바치거나 소위 까라면 까는 식으로 일을 해왔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시급인생으로 사는 동안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경험한 탓에 눈빛은 잔잔히 미쳐가고 있지만 어느 회사를 가나 하루아침에 분위기 파악을 해 저에게 더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속성 코스로 사회의 맛을 알아버린 나머지 환멸과 포기의 표정이 디폴트가 되어버린 제 얼굴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지만 사회에 첫 발을 들이던 시절보다 살기 편해진 건 사실입니다. 상황과 사람에게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어 대놓고 하는 신경전이나 텃세는 웃어넘기고 어떻게 하면 제 뽐을 보여줘 압도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이나 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꽃보다 누나> (tvN, 2013~14)에서 윤여정 배우님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죠.
"아니요 안 돌아가고 싶어요.
진짜로 안 돌아가고 싶어요.
그 젊음이라는 게 그냥 무모한 거 같아.
무모한 시절인 거 같아.
(중략) 근데 그런 무모한 나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너무 힘들게 살았나 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한 번 살고 싶어.
진심으로.
지금의 전투력을 지니고 첫 광고대행사에 입사한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4개월 만에 퇴사를 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그리고 윤여정 배우님의 말 대로 저 역시 굳이 힘들었던 신입시절의 시급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많은 회사를 돌며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일을 해오며 성취감을 느낀 건 맞지만 이제는 다른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시급인생을 살게 될 누군가에게 그 시간이 덜 힘들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제가 욕을 먹는 일이 있더라도 악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습니다. 직급도 달고 싶고 사치도 부리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저축도 하고 싶고 효도도 하고 싶었던 반짝이던 시절을 지나오며 그 시절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 시절에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힘들게 헤쳐오며 지금의 저를 완성할 수 있었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앞으로의 항해를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이전 회사 면접을 볼 때 대표님은 “이렇게 힘든데 계속 일을 하려는 이유가 뭐예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전 고민하지 않고 “글을 쓰고 콘텐츠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 제 소명이라서 아닐까요?”라고 답했습니다. 제 대답을 들은 대표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도 그랬다고, 힘들면 도망치고 쉬다가 충전이 되면 또 일을 찾아 나섰었다고 말했습니다.
최저임금보다 많은 돈을 받는다고 해서 그동안 제가 시급인생을 살며 해온 고민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민은 더 늘어나겠죠. 그럴 때마다 전 버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또 도망을 칠 것입니다. 오래 하고 싶은 일이기에, 그렇게 항해를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