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27화-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이유에 관하여
얼마 전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봤습니다. 함께 일하던 감독님이 급사하는 바람에 감독님 전속 프로듀서였던 ‘찬실이’는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버립니다. 아는 배우 동생네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실은 괜찮지 않습니다. 그래도 찬실이는 영화가 좋습니다. 영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면의 의지가 ‘장국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걸 보면 압니다. 그런 찬실이의 마음을 아는 듯 동료들과 집주인 할머니는 찬실이가 꿈을 잃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줍니다. 참 일복은 없어도 인복 하나 타고난 찬실이 입니다.
제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선 3D 직종 (Difficult, Dirty, Dangerous)에서 일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 거고 그중에는 저처럼 광고 업계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남들 보면 평온하게 직장 잘 다니고 먹고살고도 남을 만큼 돈 벌어서 펑펑 자랑하고 다니는데 우리는 왜 굳이 힘든 길을 택하는 걸까요? 공무원 시험이나 아파트 관리직에 합격하면 안정적으로 월 250만 원 정도의 수익이 보장된다고 합니다. 야근 걱정 없이 주어진 일만 딱 끝내고 퇴근 후에는 제가 좋아하는 글을 잔뜩 쓸 수 있다는데 저는 그 제안이 썩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더군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저와 같은 생각이신 분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믿겠습니다.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랑은 미친 짓이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남들이 뭐라 하든 일 년에 회사를 세 번 옮길지언정 일 하나만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할 수 있는 게 그 일 밖에 없어서, 새로운 도전에 미래를 도박할 만할 재력이 없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할 때 가장 빛이 납니다. 빛이 나는 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관계와 세계의 확장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일의 의미를 검색해 읽어보던 중 다음 구절이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과정, 특히 일을 통하여 관념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객체화시키고, 일을 통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며, 또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그래서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와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매개체이며, 구체적인 세계를 통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위 문장을 읽으니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한 명연설, <connecting the dots>가 떠올랐습니다. 잡스는 인생의 작은 점들이 모이고 모여 미래의 자신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루하루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일과 인간관계로 좁혀 생각해봐도 과연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좁은 업계에서 맺어진 연이 나중에 어떻게 짠하고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급인생으로 살아온 근 몇 년 간 사람들과 만나 웃고 울고 떠들고 싸우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일을 해왔습니다. 지독하게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눈빛만 봐도 제 생각을 찰떡같이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하다가도 어느 순간 눈 녹듯 사라진 경계심에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일과 사람 덕분에 제 세계는 넓어질 수 있었습니다. 친해지기도 전에 관계의 유통기한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일하는 동안만큼은 그들 얼굴을 가장 오래 봐야 하고 가장 많은 말들을 나눠야 했기에 진심으로 대해주었습니다. 퇴사를 하고 시간이 지나 기억들이 체에 걸러지며 잊힌 인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언제나 연락할 수 있는 서로의 연락 메이트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며 떠오른 아이디어는 성과로 이어져 히뜩이는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빌려 지금까지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덕분에 반신반의로 시작한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있었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다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이 ‘혹시 무슨 광고 만드셨어요?’라고 물어보면 ‘말해도 알까?’라는 의구심에 선뜻 대답하진 못하나 어쨌든 제가 쓴 콘텐츠를 누군가는 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등 숭고한 직업의식은 없지만 좋은 사람들과 내가 재밌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짜릿한 일이라 그만둘 수 없나 봅니다.
동료들과 수다 떨고 놀기 위해 출근하는 사람인지라 면접 볼 때도 복지보다는 회사 분위기나 팀이 일하는 방식에 관해 많은 질문을 합니다. MZ세대가 회사를 이끌어가는 코시국에 어쩌면 개인 플레이에 자택 근무가 당연할 수 있지만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다 같이 웃고 떠들다가 술 한잔하고 퇴근하는 일상에 더 정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성향 차이겠지요.
믿으면 안 되는 게 사람이라는데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일이 잘 안 풀리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이직처를 찾으며 모험을 해봤습니다. 통근시간, 연봉, 복지, 사내 분위기, 연령층, 근속연수 등 다양한 이직 기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무시하고 통근시간과 복지를 선택해봤습니다. 이로써 시급인생 탈출인가 싶었는데 첫 출근을 기다리는 내내 그리 두근거리진 않았습니다. 하도 이직을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하늘이 갸륵하게 여길 만큼 인생사 쉽고 간단한 게 아니더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곳은 이력서에 쓰지 않을 생각으로 나흘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습니다.
통근 시간이 짧으면, 복지가 대단하면, 칼퇴가 보장된다면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며 버틸 수 있었다고 착각했던 제가 바보였습니다. 경기도민에게 통근시간이야 어차피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 것이고 입사하자마자 당장 누릴 수 있는 복지는 별로 없었으며 칼퇴를 한다고 해도 찝찝한 기분으로 돌아갈 바에 제가 하고 싶은 일 잔뜩 하다가 녹초가 되어 퇴근하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우울한 이직 후 첫 주가 지나고 잠에서 깬 토요일 오후, TV에서는 <아무튼 출근> TBWA 광고 대행사 아트 디렉터 님 편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억울해졌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저런 건데…’ ‘지금까지 저런 일로 인정을 받아왔었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때 다니던 회사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쯤으로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으로 일주일 간 출근을 하니 소화불량이 와서 지금까지 고생 중입니다. 업무 성과야 숫자나 PPT 한 장으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그 일을 해내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과가 나오기 위해선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업이 필요합니다. 전 그 성과를 내는 사람들끼리 즐겁게 일해야 한다는 주의고요. 정겹게 일하는 와중에 오고 가는 부정적 피드백으로는 콘텐츠에 살을 덧붙여가고 긍정적 피드백으로는 나의 자존감과 존재가치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인정받는 게 좋아서, 그런 와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재밌는 말들이 좋아서 일을 그만둘 수 없나 봅니다.
드라마 <김과장> (KBS2, 2017) 중
일로 만난 사람들 중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결과가 좋지 않았던 회사에서 만난 분들입니다. 회사가 거지 같다고 해서 사람들까지 거지 같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오히려 대표가, 회사가 이상할수록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게 되어 연은 더 진득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좋았던 곳에서 만난 분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일하는 과정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중에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인생, 끝마무리만은 좋게 좋게 하려 합니다.
사람 너무 믿지 말라고 하지만 세상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 도움 없이 잘 헤쳐나갈 수 있단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일례로 컨펌 라인에 있는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두는 거, 별것 아닌 거 같지만 지옥 같던 직장이 천국으로 바뀔 수 있는 마법의 카드입니다. 굳이 저랑 연락하기 싫어하는 사람 붙잡아서 구질구질하게 굴 생각은 없습니다만 생각이 맞고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과는 오래오래 가고 싶은 게 작은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