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프로 이직러를 무시하지 마라

시급 인생 26화-이직에 관하여

by 가람

어떻게 회사까지 사랑하겠어 경력을 쌓는 거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그냥, 생각 없이, 평범하게 사는 거랍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즐겁게, 쉽게, 잘 처리하고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소리 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칭찬이랍시고 ‘ㅇㅇ씨는 일을 참 쉽게 잘하는 거 같아서 부러워요.’ 이런 말 하지 맙시다. 겉으로는 무탈해 보이더라도 무난한 직장생활을 위해 24시간 두뇌를 풀가동한 탓에 속은 녹슬어 있으니까요.


저 역시 무탈한 직장생활을 위해 무던히 노력해 온 사람입니다. 제가 회사에게 바라는 건 단 두 가지. 괜히 자극하거나 건드리지 말 것과 저에게 일을 추진할 권력을 쥐여주는 것입니다. 직장인이라는 게 남 (회사)의 일 해주는 사람인데, 계속 누가 딴지 걸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사기가 꺾여버리지 않겠습니까.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충족되면 다른 하나가 말썽이고, 모두 만족스럽다가도 갑자기 다 싫어지는 상황 때문에 전 프로 이직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 한 달 단위로 회사를 갈아치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프로젝트, 개월, 분기 별로 빨아먹을 수 있는 (=포트폴리오) 것들을 다람쥐가 볼에 도토리 넣듯이 챙긴 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왔습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면접관들은 싫어하실 만한 행보이긴 합니다만, 그러게 누가 자꾸 일하는 사람 건드리라고 했습니까.


아주 주옥되는 거야.







웰컴 투 약육강식 월드


직장 생활이 그러하듯 이직도 연차가 올랐다고 그냥, 잘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대학 입시 면접 준비를 하던 시절, 고3 담임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가람이는 자기 PR이 부족해.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 면접은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엄하지만 어화둥둥 키워진 스무 살 이전의 전 조신하고 착한 게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습니다. 아마 그 자리가 입시 면접이 아니라 세자빈 간택이었다면 전 1등으로 내정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5년 간 독립해서 제가 절 다시 키워내는 사이 제 안에 잠자고 있던 흑염룡이 새어 나와 사람이 변해가더니 이제는 여포 같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유난히 내성적이었던_흐림.png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고3 시절


약육강식의 사회가 절 이렇게 키워낸 거 같기도 합니다. 학창 시절엔 뭐가 그리 수줍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 성격 그대로 10년 전으로 돌아가 대외활동도 열심히 하고 반장, 학생 회장도 해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다행인 건 약육강식의 대명사인 직장 생활의 막이 오른 이후엔 바뀐 성격으로 버틸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직을 위해서 전 가진 게 없어도 몸집을 부풀려야 했습니다. ‘나’라는 상품의 USP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내가 나를 파는 영업 행위도 이직 시즌마다 지겹게 해왔습니다. 고3 시절 담임 선생님이 보신다면 감복하실 일이지요. 1년, 4개월, 1개월, 그리고 또 2주. 지금까지 이직에 걸린 시간입니다. 씁쓰레하지만 신입 같은 경력을 원하는 대한민국 사회답게 경력이라는 감투와 포트폴리오라는 증거를 들이 미니 이직이 수월해진 건 사실입니다. 돈만 주면 어디든 좋다는 노비 근성을 버리고 회사를 고르는 나만의 기준을 갖게 된 것도 다행입니다.


면접은 회사가 지원자를 보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지원자도 회사와 면접관을 평가합니다. 꼰대 알레르기가 있는 전 면접관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거나 (흡연, 음주, 애인 여부 / 외모 평가 / 함께 일할 동료 험담) 회사에 침대가 있거나 사무실 상태가 엉망이면 면접에 붙더라도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지원자의 이런 심리를 대표들도 아는 건지, 어떤 대표님은 면접 잡힌 날이면 직원들에게 블루투스 스피커로 있어 보이는 로파이 음악을 틀어 놓으라고 하시기도 하셨었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채용공고 앱에 들어갈 때마다 전 직군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는 게 참 웃깁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이직처를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전 회사와 다른 곳을 이직처로 고르곤 했습니다. 주변 이들도 이전 직장의 특정 포인트가 싫어서, 전 직장 트라우마 발작 버튼이 없을 만한 다른 회사를 이직처로 고르곤 합니다. 꼰대와 일하다 보면 젊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고, 체계 없는 데서 구르다 보면 규모 있고 체계 있는 곳으로 옮기고 싶고 그런 게 사람 심리 아니겠습니까. 물론 대한민국에 멀쩡한 회사가 있을 리는 만무하니 천국이라고 생각해 들어간 곳도 한 달만 있으면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래서 3개월, 6개월, 9개월, 1년마다 퇴사를 꿈꾸며 그 사이에 자격증 공부를 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며 또 다른 천국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놈이 그놈이다


여기까지 읽고 프로 이직러들을 욕하기 전, 일단 능력이라도 있어야 이직도 가능한 일이란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한 직장에 오래 있는 것에도 장단점이 있어 구체적인 목표나 커리어 맵 없이 그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케이스라면 그 경력은 쓸모없는 경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끊임없이 더 나은 직장 생활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움직여온 사람들은 한 번 이직할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으로 경험치는 올라가고 그만큼 더 성장해 있답니다. 우리 시급인생러들, 연봉 인상률도 얼마 안 되는데 그거 기다리느니 제가 알아서 몸값 올려서 다른 곳으로 떠나렵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이직을 하다 보니 직장 생활에 대한 로망도, 기대도 없습니다. 면접관의 감언이설이나 있어 보이지만 그림의 떡인 복지에 관심을 끈지도 오래입니다. 전 그저 월급 안 밀리고, 야근을 암암리에 강요하지 않고 (야근 시에는 추가 수당을 주고), 꼰대들이 꼰대 짓을 하지 않는 곳에서 무난하게 하하호호 사회적 웃음 지으며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 또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만 이곳저곳 옮기고 옮기다 보면 정착하고 싶은 회사를 만나겠거니, 그렇게 믿으렵니다.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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