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24화-퇴사 매뉴얼 1 업무 편
떠나야 한다면 아름다운 기억만 남기고서 떠나가 줘요
앞에서는 그만둬서 아쉬운 척 하지만 그 누구보다 회사가 꼴 보기 싫고 내 상사, 혹은 동료를 쏴 죽이고 싶은 이들이 예비 퇴사자들입니다. 미련 없이 메신저와 카톡 대화방을 나가는 거 보면 압니다. 그 유명한 퇴사 짤로 바탕화면과 사내 메신저 프사를 도배해놓고 떠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욕해도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겉으로는 웃으며 좋은 말만 해주며 보내는 게 상도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업계는 좁고 내가 저지른 업보가 돌고 돌아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프로 퇴사러를 넘어 X나 퇴사러가 된 제가 뷰티풀 굿바이를 위한 퇴사 매뉴얼을 전수해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어진 연인과 재결합해 봤자 결론은 이별입니다. 처음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와 같은 이유로 말이죠. 회사도 마찬가지로 투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퇴사를 결심했다면 그 회사와의 연은 다 한 것입니다. 당장은 미처 끝내지 못한 과업과 토끼 같은 후배들과 백수가 되면 뭐하지란 불안에 눈이 멀어 ‘그냥 지금 다니던 데나 더 다니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탄력성이 0에 가까워진 우리는 잡히더라도 처음 퇴사를 결심하게 된 기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 안에 같은 이유로 지쳐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포트폴리오에 넣을 거리를 챙겼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오십시오.
그렇다면 퇴사 통보는 언제 하는 게 맞는 걸까요? 민법 제660조에 의하면 피고용자는 사업주에게 한 달 전 사의를 표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사업주와 원만히 해결을 봐서 퇴사 통보를 한 당일에 퇴사 처리를 하고 월급을 일할 계산해서 받거나 할 수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와 사업주 사이에서 합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경우로, 업계를 뜨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인수인계와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도록 합니다.
제660조(기간의 약정이 없는 고용의 해지통고)
①고용기간의 약정이 없는 때에는 당사자는 언제든지 계약해지의 통고를 할 수 있다.
②전항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해지의 통고를 받은 날로부터 1월이 경과하면 해지의 효력이 생긴다.
③기간으로 보수를 정한 때에는 상대방이 해지의 통고를 받은 당기후의 일기를 경과함으로써 해지의 효력이 생긴다.
팀워크와 동료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중요시 여기던 저에게 제가 속한 팀이 공중분해되고 혼자서 사무실을 지켜야만 했던 최근 경험은 정말 쓰디썼습니다. 딱 한 달만 더 다니겠다고 사의를 표명했지만 그 기간 동안 떠난 팀원들의 일을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했던 것도 참 힘들었습니다. 번아웃이 온 상태에서 번아웃에 관한 카드뉴스를 기획하고 있다니, 참 웃기지 않습니까? 그래도 전 꿋꿋이 참고 일이나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좁은 업계에서 똥을 싸지르고 도망간다면 레퍼런스 콜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뻔하기 때문이죠. 꼴 보기 싫은 상사 얼굴에 사직서를 던지고 퇴사하는 거,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Show must go on
이미 마음이 식은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참 잘 압니다. 저도 퇴사 당일에는 일하기 싫어서 (아주 잠깐) 회의실 소파에 누워서 점심시간만 기다리기도 했었습니다. 다음 달의 나를 위해 미리미리 처리하던 업무도 딱히 손에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만 두면 다음 달 일은 인수인계받는 사람의 몫일 테니까요. 사업주나 동료들도 우리의 이런 심리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곤 괜히 괘씸해서 그만둔다고 말한 시점부터 눈에 띄게 따돌림을 시키거나 업무 폭탄을 던지는 곳도 있을 것입니다. 뭣 같지만 며칠 지나면 나와 상관없는 일들이니 무시하기로 합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쓸 시간도 없는 게, 퇴사를 결심했다면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입니다. 업무 쳐내는 짬짬이 내 짬 처리도 열심히 해줘야 퇴사 당일에 인사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해야 할 걸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기본은 나의 뒤를 이어 줄 누군가를 위해 인수인계를 하는 것입니다. 한 오후 4시쯤 대충 업무는 끝났고 굳이 일을 찾아서 하기 힘들 땐 워드 파일을 켜서 인수인계서를 미리미리 써 놓습니다. 각 단계별로 필요한 파일 서식도 모아둡니다.
역마살 잔뜩 낀 저는 언제 또 회사를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커서 매달 개인 자료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해둡니다. 퇴사 직전에 근 1년 치 자료를 정리한다는 건 굉장히 성가시기 때문이죠. 내가 쓴 기획서나 아이데이션 했던 파일들, 개인적으로 정리한 레퍼런스를 월별, 과업 별로 모아 외장하드에 넣어둡시다. 나중에 포트폴리오 만들 때 아주 유용할 겁니다.
고소당하기 싫으면 회사에서 작업했던 파일은 절대 지우지 않고 회사 컴퓨터에 백업해둡니다. 후임자와 내 자리를 치워줄 이들을 위해 미처 다 뿌리지 못한 명함과 개인 짐도 미리미리 챙겨둡니다.
퇴사 시 필수로 요구해야 할 서류는 1. 경력증명서와 2. 원천징수영수증 이 두 가지입니다. 실업급여를 받아야 한다면 추가적으로 그에 필요한 서류를 요청합니다. 혹시 내가 그 회사에서 일을 특출 나게 잘했다면 슬며시 추천서도 부탁해봅니다.
요청할 걸 요구했다면 이젠 회사 측 요구도 들어줘야 합니다. 사측에서 요구하는 퇴사 서류를 꼼꼼히 읽고 서명합니다. 출입증과 회사 물품도 반납해 나중에 연락 오는 일 없도록 합니다.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퇴사 통보를 하고 나서는 퇴사일까지 하루하루가 길게만 느껴지다가도 막상 퇴사일이 되면 시원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전 마지막 날에는 신세 진 사람들에게 진심이 담긴 메일이나 메신저를 남기고 떠납니다. 지금 읽어보면 오글거려 죽겠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떠난 그날의 기록들 덕분에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회사는 절 부려 먹었고, 전 그 대가로 월급을 받고 무언가를 배워갑니다. 그거면 된 겁니다. 우리 하나 없어도 회사는 어찌어찌 잘 굴러갈 테니 우리는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한 나와 내 주변에 에너지를 쏟으며 다음 도약을 위해 충전을 합시다. 그럼 이만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