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아

시급 인생 25화-퇴사 매뉴얼 2 감정 편

by 가람

계륵같은 회사


가수들이 콘서트가 끝난 뒤 적막한 방 안으로 향하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답니다. 퇴사하는 직장인도 마찬가지로 근무 마지막 날,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면 시원섭섭한 마음이 몰려옵니다. 회사를 떠나게 된 이유가 자의든 타의든 회사도 하나의 관계이며 그 어떤 관계든 끝나고 나면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니까요.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메일함과 유선전화, 본인 감정을 휘두르는 상사, 떠나간다고 입 싹 닫는 동료들, 떠나는 날 직전까지 쌓여있는 업무, 나 아니면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턱턱 막혀오는 숨… 지긋지긋한 것들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하루를 온전히 채워주는 곳이 직장입니다. 때로는 성취감을 때로는 동료애를 느끼며 가뭄 속 단비 같은 행복을 맛보기도 하죠. 나의 하루를 이루던 모든 요소가 빠져나가면 내 몸과 마음도 뻥 뚫린 기분이 들 겁니다.


텅 빈 모니터랑 자리를 보니 괜히 가슴이 지잉 하더군요. 28. OCT. 21


퇴사를 결심한 뒤 하던 일을 잘 인수인계하고 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치여 정작 본인의 감정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해야 내 마음까지 챙기며 직장 생활을 아름답게 매듭짓고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1. 영원한 인연은 없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선우정아 <그러려니> 中


먼저 연락하는 걸 어려워하는 타입인지라 졸업, 이사, 퇴사는 제게 영원한 끝을 의미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퇴사를 몇 번 반복하면서 ‘어차피 내 사람은 곁에 남는다’라는 팩트를 깨닫고는 끊어진 인연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에게는 자발적으로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 연락을 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여러분을 소중하고 능력 있게 생각해주는 동료들은 퇴사 후에도 꾸준히 소식을 전하며 여러분이 가는 길을 응원할 것입니다.


각자 다른 곳에서 퇴근 후 함께 옴뇸뇸뇸 25. OCT. 21


세상 사람들 중 8할은 나에게 무관심하고 2할 중 대부분은 나를 싫어하고 극소수의 사람만이 나에게 관심이 있고 좋아해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회사도 마찬가지로, 끊어진 대부분의 연에 실망하기보다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도, 커리어에도 도움이 됩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회사를 떠난 나와 여전히 회사에 남아있는 동료들은 이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같은 조직 안에 있을 때야 매일 같이 상사 욕하고 적시면서 라뽀 (rapport;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기는 상호신뢰 관계)가 무럭무럭 싹트겠지만 관계를 유지하던 공통 경험이 사라지는 순간 남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정말 쿵짝이 잘 맞아 친구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무니 그냥 떠나갈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놓아줍시다.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

2. 이직을 위한 넥스트 레벨


헤어진 연인 SNS를 뒤지면서 프사를 뭐로 바꿨는지 체크하고, 상태 메시지 뜻이 뭔지 유추하고, 프로필 뮤직으로 그 사람의 감정을 짐작하는 게 얼마나 시간 낭비인 짓인지 잘 아실 겁니다. 전 구 애인들 SNS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데 구 회사 잡플래닛이나 홈페이지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아서 퇴사 후 매일 같이 들락날락하곤 합니다. 잡플래닛에 별점 1점짜리 리뷰가 달리면 ‘그럼 그렇지’하고 읽으며 ‘이 리뷰 후기가 도움이 됨’ 버튼은 꾸욱 누릅니다. 제가 운영하던 기업 SNS를 인수인계받은 사람이 얼마나 잘하는지 얄미운 시누이처럼 엿보기도 합니다. 딱히 나쁜 일을 하는 건 아닌데 이 짓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현타가 옵니다.






퇴사 후 신물이 나서 떠난 옛 곳의 소식을 들으며 희열을 느끼는 것보다는 그곳에서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걸 경험하는 게 훨씬 영양가 있습니다. 항공에서 광고로 업계를 옮긴 지 2년째, 첫 직장은 힘들어서, 두 번째 직장은 대표가 폭언을 해서, 세 번째 직장은 팀이 공중분해돼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경력직의 면접은 신입의 면접과 달라 업무 퍼포먼스를 증명하고 처우를 협상하러 가는 자리인지라 옛날보다 긴장은 덜 됩니다만 이직 사유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땀이 삐질삐질합니다.


이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버티지 못했다는 자책을 애써 숨기며 순차적으로 대답하지만 그런 제가 너무나도 싫어서, 혹시나 이직처에서도 이전 직장에서 겪었던 나쁜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이직이 결정돼도 맘 편히 기뻐하질 못합니다. 게다가 경력직이 이직한다는 뜻은 이직 후 월급값 = 밥값을 잘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라서 더욱 불안합니다.


에디터들 생각하는 거 똑같구나.. 05. NOV. 21


이런 상황에서 옛 직장을 향한 증오나 ‘다음 직장도 똑같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은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시급인생을 살며 이미 우리는 과도한 업무와 야근, 짠 연봉, 체계 없는 곳에서 활개 치는 꼰대들, 생각 없는 후배들을 보며 구를 대로 구른 우리는 분명히 성장했습니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힘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 퇴사 후에는 부디 잘 쉬고, 잘 먹고, 잘 배우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유독 여운이 긴 드라마가 있습니다. 마지막 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브라운관 앞에 앉아 어딘가에 살아 있을 듯한 주인공들의 행복을 빌곤 했습니다. 한동안 여운에 잠겨 다른 드라마는 볼 수도 없을 것 같고 혹 보게 되더라도 이전 드라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전 어느새 새로운 작품을 찾아 다른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2021년 생일에


가끔 내 안의 드라마가 끝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퇴사 후에도 마찬가지고요. 내 빈자리는 별것도 아니란 듯이 직장은 아무쪼록 잘 굴러갈 겁니다. 내 자리가 없어졌다는 불안과 끊어진 인연에 쓸쓸한 기분이 당분간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여운이 길다는 건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 아닐까요? 그러니 괜찮습니다. 우리는 드라마 하나를 잘 살아낸 주인공이니까요. 그리고 또 새로운 드라마는 시작할 테니까요.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중략)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이동진 영화평론가님의 <터널을 지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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