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23화-결심에 관하여
속세에 찌든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는 순간 어른이 된 거라고 말합니다. <아기공룡 둘리> 속 고길동이나 <무한도전> 속 명수 옹, <네모네모 스폰지밥> 속 징징이, 그 외 수많은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얼굴 중에는 저와 제 주변의 시급 인생러들도 있습니다.
내 손으로 보험금과 각종 고정 지출을 감당하게 된 순간부터 속세에 찌든 캐릭터에 연민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매일 속으로 '퇴사하고 싶어!'를 외치지만 다음 달 카드값을 위해 출근하는 불쌍한 너와 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대표와의 퇴사 면담을 신청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퇴사를 결심하게 되는 걸까요? 그만 두면 어디서 당장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지겨운 취업 준비도 다시 해야 할 텐데, 브런치만 해도 #퇴사 키워드로 검색되는 글이 천지삐까리입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과 안정적인 삶, 사회적 지위를 다 포기하는 이유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뭣 같아서’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만 연인과 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이유로 쉽게 퇴사를 결심하진 않습니다. 과도한 업무, 감정파 상사 비위 맞추기, 짠 연봉, 한숨만 나오는 후배들, 앞이 보이지 않는 회사 비전 등에 지쳐서 마음속에 퇴사 다이너마이트를 하나씩 품고 있다가 그 폭탄에 불을 지피는 결정적 사건 때문에 우리는 퇴사하겠다는 다짐을 터뜨리고 맙니다.
차이는 게 낫지
제 커리어를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1. 오래 다닌 회사가 없다. 와 2. 단 한 번도 후련하게 퇴사를 한 적이 없다. 이 두 가지입니다. 이직 면접에서도 항상 물어보는 질문은 ‘재직 기간이 짧은 데 왜 이렇게 자주 회사를 옮겨 다녔냐?’입니다. 면접에서 이전 회사 욕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최대한 감정은 덜어내고 팩트만 남겨 이유를 말합니다. 속 시원하게 말하자면 사람 취급 못 받아서와 업무 강도에 비례하는 임금을 받지 못해서가 잦은 이직의 사유되시겠습니다.
관리팀 차장은 사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내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고심하더니 이직과 퇴사가 잦은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보라고 했다.
(중략) 첫번째 직장에 다닐 때 엄마가 수술을 하셨는데 제가 간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중략) 차장은 두번째 직장에선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6개월 근무하고 경영 악화로 퇴사를 권고받았는데, 그 뒤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다시 일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아서 반년 동안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습니다.
(중략) 세번째 직장에선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통근 시간만 네 시간 가까이 걸려서 어쩔 수 없이 퇴사했습니다.
(중략) 그러자 차장은 네번째 직장에선 또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이력서에 씌어져 있는 그대로였다.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경영 악화로 퇴사를 권고받았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곧바로 짤막한 손톱만 내려다보았다.
<소설 보다 여름 2021-미조의 시대> 이서수, 문학과지성사, 97-98pp.
올해 발표된 소설 속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 주변 상황과 썩어빠진 시스템이 문제라서 퇴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차장급 관리직이라면 왕복 4시간씩이나 걸리는 회사에 애초에 왜 지원했냐고 나무라기 전에 그 지원자가 당장 백수가 될 걸 알면서도 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던 이유나 조건이 불만족스러운 회사에 등 떠밀리듯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찾아 고칠 생각이나 먼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와 이직과 퇴사가 잦은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자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고 싶어서, 신입에게 못되게 구는 팀장 언니가 싫어서, 성희롱과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육십 먹은 대표가 인간 말종처럼 느껴져서,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껴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돈도 안 주면서 일은 오지게 시키는 회사들 덕분에 재직 기간 대비 빵빵한 포트폴리오를 쌓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몇 개월간 고생한 대가가 겨우 파워포인트 두 세장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적어도 제 몫은 챙겨 나올 수 있어서 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평온을 비는 기도> 라인홀트 니버
성인 ADHD 증상 중 하나가 ‘잦은 퇴사’라고 합니다. 여러 증상 중 하나일 뿐인데 나도 혹시 그런 케이스가 아닌가 하고 객관 오류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한 탓에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회피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리셋 증후군 중독은 아닌가 라는 자책도 자주 했습니다.
광고인의 꿈을 안고 들어간 첫 회사를 4개월 만에 그만두고 나와서 내리 4개월간 백수로 지내면서 엄청난 자괴감에 빠졌던 적도 있습니다. 주변 어르신들 말을 들으면 신입 때는 다들 깨지고 혼나면서 배우는 거라는데, 그거 하나 못 견디고 무턱대고 퇴사한 그때 당시의 전 앞으로도 일 못하는 낙인이 찍혀 평생 폐급 소리나 들어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들어간 다음 회사에서 만난 팀장님은 저에게 ‘참 일 잘하는 애’ ‘뭐 하나 알려주면 금방 흡수해서 자기 걸로 만드는 애’라고 말씀해주셨고 결국 그 말에 힘을 얻어 다음 이직처에서도 센스 있고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만 있으면 알아서 잘 해내는 사람이란 걸 깨달은 뒤로는 통제 불가능한 요인으로 벌어진 일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퇴사를 고민하고 계신 분들 중 대부분은 ‘내가 지금 여기서 그만 두면 갈 곳이 있을까?’의 대답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본인의 노력 부족은 외면한 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성공 퇴사썰만 믿고 퇴사하려는 분들은 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퇴사는 연차가 쌓이든, 그에 비례하는 포트폴리오가 쌓이든 뭔가 비벼볼 구석이 있을 때도 불안한 것이니까요.
징징대면서 하는 퇴사는 순전히 우리 탓이지만 대표가 자꾸 감시하고 소리를 질러서, 야근은 야근대로 하는데 포괄임금제로 계약을 해서 수당을 못 받아서, 실적과는 별개로 야근을 안 한다는 이유로 일을 안 한 다는 소리를 들어서 하는 퇴사는 우리 탓이 아닙니다. 시급 인생이라고는 해도 부당함에 이를 갈고 버텨야 할 만큼 제가 소중하지 않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도 버티면 지나간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도 계시겠지만, 글쎄요. 일단 팩트는 제 멘탈에 금이 갔다는 거고 금융 치료라도 해줄 거 아니면 꺼지시라고 합시다.
평생직장은 없다고 하지만 2년 차에 벌써 다섯 번째 직장을 찾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웃프지만 회사는 많고 그만큼 퇴사자도 많으니까 구인구직 사이트에 매일 같이 채용공고가 올라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딜 가든 또 번아웃이 올 만큼 잘 해낼 거고 갈 회사는 많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퇴사자는 그럼 이만 ‘쉬울 줄 알지? 한 번 해봐’ 마인드로 운영하던 SNS 채널이나 구경하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