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편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벤 스틸러, 2013)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잡지사 <LIFE>의 필름 현상 부서에서 일하는 ‘월터 미티’. 특기는 망상이지만 현실에서는 좋아하는 직장 동료에게 말을 걸 용기조차 없는 소심이입니다. 어릴 적에는 모히칸 머리를 하고 스케이트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용기가 있는 아이는 자라 데이팅 앱 자기소개란의 ‘특별한 경험’ (Been there Done that) 섹션에 내세울 내용조차 없는 심심한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여행 수첩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나이가 들어가며 어릴 적 패기는 전부 상상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나 봅니다. 상상 속에서 만큼은 세상 제일 멋쟁이이자 블록버스터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현실에서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인의 삶 그 자체를 살아갑니다.
회사의 혁신은 직원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죠. 회사에 충성한 시간이 길면 길 수록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윌터 역시 16년간 몸 담은 잡지사가 ‘디지털화’를 외치는 바람에 부서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며 마지막 에디션 발행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와중에 월터와 오랜 기간 일해온 유명 포토그래퍼 '숀 오코넬'은 <LIFE>지의 마지막 표지에 장식될 삶의 정수가 담긴 ‘스물다섯 번째 필름’을 월터 앞으로 보냈다고 하지만 보이는 건 나머지 스물네 개의 필름과 <LIFE>지의 모토가 각인된 지갑뿐입니다. 잡지 발행일까지 필름을 찾아야만 하는 월터. 숀이 보낸 필름은 과연 어떤 컷일까요? 월터는 마침내 아버지가 주신 여행 수첩을 들고 자신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필름 찾기 모험을 떠납니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표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the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LIFE>지의 모토
때로는 대단하지 않은 것이 특별한 것
처음 영화를 보던 저 역시도 스물다섯 번째 필름은 아주 대단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월터의 상상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미쟝셴이 담겨있거나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 찍혀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LIFE>지의 마지막을 장식할 컷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어딘가에 걸터앉아 필름을 바라보는 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한 컷에 담긴 소시민적 모먼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작고 일상적인 것들을 향한 예찬이 영화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엄청난 특수촬영과 자연의 광활함이 무엇이 평범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 과정과 과정을 이어주는 요소에 주목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물다섯 번째 필름을 찾기 위한 힌트로 숀이 보낸 앞선 스물네 개의 필름에는 누군가의 엄지에 끼워진 반지, 엄마의 집에 있는 가구의 일부분, 파도의 잔상 등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평소에 놓치고 있던 오브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월터의 필름 찾기 여정 속에서도 엄마의 오렌지 파운드케이크와 스케이트보드, 데이팅 앱 직원과의 인연처럼 일상적인 것들이 큰 도움을 주죠.
봄은 우리 집 매화 가지에 걸려 있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인생의 목적을 잃었을 때 도움이 되는 건 나의 일상과 주변, 그리고 이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한 노력과 자각이라고 말해줍니다. 월터가 그토록 찾고 있던 스물다섯 번째 필름이 실은 숀이 보낸 지갑 속에 숨어 있었다는 건 파랑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 뻔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애초에 이 영화는 뻔하디 뻔한 것들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것을요.
현대 철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김영사, 2022)에서 보고 인식하는 감각을 갖추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을 ‘감탄하는 능력’ (133pp)이라고 합니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중국의 시처럼 우리가 찾고 있는 건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단지 우린 그걸 보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저의 이번 주는 따뜻해진 날씨가 미울 정도로 평범하다 못해 지루했고 나아가선 ‘왜 모든 좋은 일들은 저를 비껴 지나갈까’ 하는 한탄도 많았습니다. 분명한 건 여기서 조금만 더 특별해졌으면 할 뿐이지, 저를 이루는 일상이 사라진다고 하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섭섭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평범함을 잊은 저를 위해, 그리고 저와 같은 감정을 겪고 계신 분들을 위해 편지를 써봅니다.
2022년 4월 15일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