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그린 별 같은 별종들에게

<어디갔어, 버나뎃>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9)

by 가람
실패가 내 안에 파고들어서 놓아주질 않아


“고통에 익숙한 사람, 잘 견디는 게 디폴트인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괜찮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혹시 하고 있다면.”
<런 온, 5화 중> (JTBC, 2020)


<어디갔어, 버나뎃>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9)의 주인공 ‘버나뎃’은 마음 한 켠이 뚫린 듯 공허함에 사무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별종이라고 부르며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죠. 버나뎃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총량은 턱 없이 적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너무나도 많은 시련을 그녀에게 가져다줍니다. 건축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버나뎃이었지만 멍청한 토크쇼 진행자로 인해 물거품이 된 프로젝트와 재가 되어버린 건축물, 4번의 유산 등 커리어와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녀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건축계에서는 물론, 버나뎃 자신의 인생에게서도 말이죠.


이미지 출처: <어디갔어, 버나뎃> 네이버 영화 스틸컷 (이하 동일)


이 영화의 후기를 읽던 중, ‘버나뎃을 이해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지만 응원하게 된다’는 식의 댓글에 크게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버나뎃의 상실(loss)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그녀를 사회 부적응자에 정신이상자로 분류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이 영화를 보며 버나뎃에게서 저의 까칠함과 예민함, 그리고 상처를 봤습니다. 그리고 믿었죠. 잠깐의 회피 이후 버나뎃은 다시 세상으로 나와 관계를 재건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요. 일이 안되거나 저를 별종처럼 바라보는 시선에 힘들어할 때, 제가 받고 싶은 응원도 기다림과 믿음이었기에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되더군요. 그렇다면 버나뎃을 다시 일으킨 힘은 무엇일까요? 이 편지와 함께 버나뎃의 방황과 치유, 그리고 재창조의 길을 함께 해보실까요?






무너뜨리고 세워 올리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상처받기 쉬운 이들의 회피적 치유 방식에 대한 응원과, 이들이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건 직업적 소명 의식이라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세상과 동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한 버나뎃이 다시 세상으로, 가족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혼자 동떨어져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을 보냈기에, 그리고 그 결과 다시금 건축의 꿈을 꿀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버나뎃이 회피 성향을 보인 이유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반복되는 실패를 모르는 이웃들은 물론, 버나뎃의 상실을 다 알고 있는 남편 ‘엘진’조차도 그녀를 사회 부적응자 취급을 하죠. 하물며 엘진은 정신과 선생님을 몰래 만나 버나뎃을 정신 병원에 입원시킬 계획까지 짭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외면받는 동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준 건 오랜 동료 ‘폴’의 한마디입니다. 작품 중반부 버나뎃과 폴의 대화, 그리고 엘진과 정신상담사의 대화가 교차되는 장면에서 이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버나뎃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남편과는 달리, 그녀의 공허함의 원인을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폴의 한마디가 버나뎃 인생 재건의 뼈대가 되어줍니다.



본인 작품이 또다시 허물어질 두려움에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하는 버나뎃에게 폴은 “People like you must create.”라고 조언해주죠.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만 한다면 평생 그 자리일 것이라고, 상처를 바라보다 보면 마음의 환기도 되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요.



건축에서 손을 떼고 있던 버나뎃은 자의 반, 타의 반 우연히 떠난 남극 탐험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동시에 새로운 건축 기회를 잡고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잊고 있던 재능과 일을 할 때 반짝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뒤로 거짓말같이 버나뎃을 감싸고 있던 분노와 공허함이 사라지는데요, 역시 그녀에게 필요한 건 정신 치료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심리적 여유와 주변의 응원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세상 사람 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버나뎃에겐 ‘건축’이 그 대답일 겁니다. 건물 화장실 하나를 짓더라도 최고의 편의를 위해 직원 성비는 어떻게 되는지, 업무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연구하는 게 버나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게나 좋아하는 일이라도 슬럼프는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결과물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보게 된다면 창작자의 마음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글을 업이자 취미로 삼고 있는 저 역시 아무런 반응 없는 글을 계속해서 써야 할 때나 남의 입맛에 맞는 글을 반복해서 찍어내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글 쓰는 걸 멈추게 되죠. 내키지 않은 일을 그만두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뭐라도 쓰지 않으면 해까닥 미쳐버릴 것 같아 키보드 앞에 앉습니다. 어색한 시간도 잠시, 방황의 시간 동안 느낀 감정을 거르고 걸러 옮겨 적죠. 그러고 나면 개운함이 몸을 휘감고 새로운 글을 쓸 추진력을 얻습니다.






“사회의 위협이 되기보다 우선 예술가가 될게”



고통에 민감하다고 해서, 끊임없이 창작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들이 이상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을 (누가 정한 건지 모르겠는) ‘평범’의 범주에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더욱 상처받고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의 불친절보다는 적당히 먼 사람의 진심 어린 충고 한마디가 그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버나뎃이 오랜 동료의 한 마디에서 힘을 얻은 것처럼 말이죠.


이 영화를 보고 버나뎃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제 자신이 안쓰러웠지만 덕분에 저도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적당한 까칠함은 유지하며 좋아하는 일이나 잔뜩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습니다. 채워져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결핍을 지닌 이 세상의 버나뎃들에게 부디 충분한 시간과 이해, 축복이 함께하기를.


*제목은 아이유 <celebrity> 곡 소개에서 차용함


2022년 5월 1일

일요일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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